우리는 종교라는 말을 들으면 곧 여러 종교를 떠올립니다.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힌두교 등을 나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들이 서로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살핍니다. 그러한 우리의 태도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를 알겠다고 나선다면 그렇게 종교들을 견주어 살피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다른 태도로 종교를 살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종교를 그렇게 각각의 전통에 따라 서술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어떤 경험'이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을 드러내게 하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하늘' '땅' '시간' '공간' 등의 주제와 연결하여 종교들을 재편성합니다. 서로 '나누어' 다뤄지는 종교들이 여기에서는 모두 해체되고 용해되어 '새로운 범주' 안에서 앞에서 예를 든 그러한 '낯선 주제들'로 되묶여 다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인식이나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하는 해석이 개개 종교를 일컫던 때와는 다른 차원에서 다른 내용으로 펼쳐집니다. 그래서 개개 종교가 아니라 '인류의 종교경험'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태도가 새로운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개개 종교의 벽을 넘어 '인간의 경험으로서의 종교'를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에 대해 각개 종교의 전통을 중심으로 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자리에서 가해지는 비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까닭인즉, 불교라든지 이슬람이라든지 하는 특정한 역사-문화적 구체성을 다 벗겨버리고 그것을 모호한 보편성의 울 안에다 펼쳐놓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상상력에 뿌리를 둔 감상적인 휴머니즘을 통해 종교를 다루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방법은 역사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성조차 존중하지 않는 부정직한 태도라고 주장합니다.
공연히 종교와 관련된 번거로운 논의가 길어졌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우리가 처한 어려움에 대해 다양한 처방들이 진지하게 제시되면서도 실제로는 그 처방들이 별로 효과적인 출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종교와 관련한 논의와 연결하여 살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개념들, 새로운 방법론, 새로운 이념으로 문제를 풀어가려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처방은 때로 역사를 일탈하는 듯한 낌새를 보여 조금은 불안해도 그러한 시도자체는 고무적입니다. 상상력이 확보하는 가능성의 공간이 창조의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역사적 경험을 심화하면서 거기에서 비롯하는 지혜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려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러한 처방은 때로 내일을 어제의 규범으로 묶는 듯한 불안을 드러내면서도 그 시도 자체는 고무적입니다. 경험에 대한 깊은 성찰은 과오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만큼 줄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자리든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자기를 주장하는데 이르면 사태는 달라집니다. 앞의 자리에서는 스스로 새롭다고 여기는 자기 현실 안에 자신을 판단하고 다시 살필 수 있는 아무런 준거도 두지 못하게 됩니다. 축적된 경험이 없이 마냥 새롭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움은 열려있지 않은 '닫힌 새로움'이 됩니다. 뒤의 자리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입장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기 현실 안에서 그 지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을 적용할 공간이 없이 지혜롭다는 것은 열린 현실성이 없는 '닫힌 지혜'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입장이거나 자신의 자리가 자족적(自足的)이라고 여긴다면 그 순간부터 그 입장은 자기를 스스로 속이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닫아놓았으면서도 열려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우스개 소리를 들어보십시다.
한 성실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사랑했고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아내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어려운 일에 부닥쳤습니다. 그 때 그는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고, 아내는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덕으로 어려움을 견디어냈습니다. 그런데 또 새로운 곤경이 닥쳤습니다. 이번에도 남편은 아내에게 조언을 청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내밖에 자기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내의 조언을 따라 새 어려움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난제와 부닥쳤을 때도 남편은 아내의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친구가 끼어 들었습니다. "번번이 자네 아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야. 하지만 이제는 자네 아내가 자네를 남편으로 선택했다는 것도 기억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자기 스스로 도취해 있는 닫힌 '새로움'의 딜레마는 이러합니다.
어떤 사람이 경찰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경찰이 갑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잘 안다고 하고는 그런데 갑을 알려면 그의 부모를 알아야 한다면서 장황하게 갑의 부모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듣고 있던 심문관이 그 부모가 아니라 갑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갑을 알려면 그 부모의 부모를 또 아셔야 합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계속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참고 있던 심문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 성하질 않군!' 그래서 그 사람은 정신병원에 이송되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갇힌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만의 정서에 함몰된 닫힌 '지혜'의 딜레마는 이러합니다.
풀어야 할 일이 얽히고설켜 참 어렵습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국가든 이런저런 대응책을 내놓아 상황을 열어보려 하지만 어떤 것도 스스로 닫히는 딜레마를 지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무릇 대응책은 '이것 만'이 해답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만 처음 겪는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옅고 진한 차이는 있어도 삶의 일상인데, 요즘 그 색깔이 짙어 새삼스레 그것을 더 저리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성급하게 낙관할 것도 아니고 비관할 것도 아닙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좀 더 차분히, 좀 더 기다리면서, 딜레마가 없는 대응책을 모색하기보다 그 딜레마를 오히려 승인하면서, 다만 그것이 닫힌 것이지 않도록 한껏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예상하지 않았던 의미를 지금의 어려움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난의 극복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한 대응책을 마련하여 이루는 일이 아니라 그 고난을 의미 있는 것으로 수용하여 비로소 이루는 일입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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