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영화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떠올랐다. 1996년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 작품으로 쿠엔틴 타란티노가 각본을 쓰고 동생 리치 역을 맡았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선병질적인 리치가 무자비한 악당 형 세스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영화는 감옥에 갇힌 세스를 동생 리치가 탈옥시키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훔친 자동차 트렁크에 인질을 싣고 멕시코 국경을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도 잔인무도한 행각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이 황혼녘에 도착한 곳은 술과 여자들이 있는 커다란 클럽이다. 손님들은 만취했다. 뜻밖의 총상으로 피가 튀자 돌연 클럽 안의 무희와 수많은 종업원들이 인간의 허물을 벗고 흡혈귀로 변해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두 번 다시 새벽이 오지 않을 듯한 긴 밤이 이어진다. 인간들은 수적으로 열세다. 박쥐들이 까맣게 하늘을 뒤덮었다. 느닷없이 좀비 호러물이 된 영화 후반부에서부터 어느 샌가 내가 악마인 세스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스야말로 흡혈귀와 다를 바 없는, 아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피를 좇는 흡혈귀의 비애도 알지 못하는 흡혈귀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내가 흡혈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세스 편에 서 있는 동안 세스는 흡혈귀에 맞서 굴하지 않는 정의의 사도로 돌변해 있었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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