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자가 가수생활 50주년을 기념한다고 떠들썩한 가운데 조용히 50주년을 맞고 있는 톱 클래스 가수가 있다. 바로 최희준이다. 이미자는 19살의 어린 나이로 1959년 HLKZ 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TV가 주최한 노래자랑에서 데뷔 하였고, 최희준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군쇼 를 통해 데뷔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그는 이미 1년 전에 가수경력을 쌓았으니까 50주년이 넘은 셈이다. 원래 그는 1958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한 해 늦게 졸업 했다.
최희준은 서울 토박이다. 종로구 익선동의 '최부자 집'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키는 크지 않았지만 다부진 면이 있고 정이 많아서 친구들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경복 중ㆍ고등학교를 나오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부친의 뜻이라는 것은 고등고시(지금의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돼라는 것이다. 착한 아들 최성준(그의 당시 본명)은 부친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한데 그의 몸 속에는 부친이 모르는 '끼'가 숨어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꿈이다. 그는 특히 미국가수 냇 킹 콜(Nat King Cole)을 흠모했다. 처음에는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멋지게 부르는 것만이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아주 잘한다. 가수해도 되겠다." 라는 칭찬을 받으면서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
이때부터 최성준은 최희준으로 삶이 바뀐다. 미군부대 쇼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전문가들 앞에서 오디션을 봐야 한다. 물론 오디션 결과에 따라 출연료와 출연횟수가 달라지는데 그는 항상 트리플 A(AAA)를 받았다. 노래에 열중하느라 자연히 판사의 길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부친이나 가족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노래 부르다 늦게 들어오면 공부하다가 늦은 것으로 여길 뿐이었다. 여기서 그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노래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고등고시에 붙어 판사의 길로 갈 것인가? 이런 기로에 있을 때, 그가 가수의 길로 결심을 굳히게 만든 것이 일반무대의 경험이다.
1958년부터 60년 사이에 미군부대의 쇼 무대에서 활동하던 가수, 연주자, 무용인 등이 일제히 일반무대로 재데뷔하는 , 이른바 '연예인 대 이동' 현상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한국 연예계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는 것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따라서 최희준도 59년도에 일반무대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여기서 당연히 큰 어려움을 만난다. 부친에게 "아버지, 저, 판사 하지 않고 가수 하겠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무슨 얼굴로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알려질 때 알려지더라도 당분간 비밀로 하기위해 예명을 최희준으로 바꾼다.
그 당시에는 각 가정에 TV 보급이 거의 안됐고 또 가수들이 주로 라디오와 쇼 무대 등에서 활동 했다. 최희준은 따라서 부친에게 자신이 가수라는 사실을 충분히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복병은 있었다. 바로 신문이다. "서울대학교 출신 가수, 냇 킹 콜이 감탄한 가수, 허스키 보이스에 달콤한 창법의 가수 최희준 등장"이라고 신문에 사진까지 실리는 바람에 부친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거 큰 일 났다." 라고 생각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다." 라며 매 맞을 각오를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의 부친이 오히려 아들을 격려하는 것이 아닌가. "정,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그러나 최고가 되지 못하겠으면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마라." 그는 날듯이 기뻤다. "그래, 까짓 거 최고가 되자."
행운도 따랐다. 작곡가 손석우 선생을 만난 것이다. 일반 무대에서 밤낮 없이 미국 노래만 부를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자기에게 맞지 않는 노래를 가지고 선 보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손 선생이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라는 명곡을 만들어 주게 된다. 우리>
마침 60년대 초에 우리나라는 라틴 풍의 음악이 유행 하고 있을 때였는데 '올드미스'는 차차차 리듬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가사에 외래어를 넣은 것도 새로운 시도였으며 최희준의 이미지를 살리는 역할을 크게 했다. Oh, Thank You, Oh, Help Me, What Shall I Do, Number One 등을 가사에 삽입하는 경우가 그 때까지 거의 없었다.
이 노래를 시작으로 최희준은 수 많은 히트 곡을 발표한다. <엄처시하> , <하숙생> , <진고개 신사> , <길잃은 철새> , <종점> , <맨발의 청춘> , <빛과 그림자> , <팔도강산> , <나는 곰이다> 등등. 나는> 팔도강산> 빛과> 맨발의> 종점> 길잃은> 진고개> 하숙생> 엄처시하>
그러나 그에게는 남모르는 정신적인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그를 소개할 때 항상 따라 다니는 학사가수,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그것이다. 그 때는 대학을 졸颱?가수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몸가짐은 물론이고 덥석덥석 아무 노래나 부를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자니 사생활에 많은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최희준과 각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가끔 이런 자신의 고충을 나한테 이야기 하곤 했다.
1968년쯤으로 기억이 되는데, 용산에 있는 그의 집에서 술을 한잔 하면서 나는 그에게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여러 가지 조건에 합당할 뿐더러 연예계에서도 정치인이 나와서 문화예술정책에 깊은 참여를 해야 한다고 내가 열변을 토했더니 최희준은 아주 싫은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1996년, 15대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연락이 왔다. 본명인 최성준으로 출마하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최희준을 본명으로 바꾸는 법적절차를 마쳤다고 했다.
그리곤 "30년 전에 국회에 나가라고 할 때 나갈 걸" 하면서 껄껄 웃었다.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 되었고, 성품대로 깔끔하게 임기를 마쳤다. 이제 그는 다시 가수로 돌아왔고, "노래를 사랑하고 열심히 부르는 가인으로 살겠다"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참 좋은 가수이고 참 좋은 술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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