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에이프만은 지체높은 남편과 사랑하는 자식을 두었으면서도 다른 남자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버리는 여자들에 관심이 없다. 그가 집착하는 주인공은 톨스토이의 소설에 그려진 바로 그 안나 카레니나다.
비록 브론스키와의 첫 만남이 기차역이 아닌 무도회장으로 바뀌었고, 원작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레빈과 키치와의 사랑은 통째 생략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그 주인공임이 틀림없었다.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인 '안나 카레니나'는 조각처럼 키 크고 잘 생긴 무용수들이 일단 관객을 압도한 후에야 주인공의 마음속을 헤집고 조이는 전형적인 에이프만 표 발레다.
고전 발레를 리메이크한 '돈키호테'나 미국식 표현이 넘쳐났던 '후즈 후'는 역시나 외도였던 것. 1막은 멋진 무용수들의 향연이 돋보였을 뿐 극적 감동은 평이했다.
그러나 그것이 에이프만의 공식이다. 2막, 특히 피날레에 감동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베네치아 황금가면을 쓴 군무진의 가장 화려한 춤 다음에 억지로 행복한 척하던 이 커플이 러시아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 장면이라든지, 안나가 인간 무리의 기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는 묘사는 탁월했다.
안나와 브론스키를 소외시킨 모든 다른 등장인물들, 브론스키가 현실적인 한계에 사랑을 포기하자 안나는 이들 검은옷의 괴물 앞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죽은 다음엔 선로에서 치워야 할 쓰레기일 뿐. 러시아 특유의 스산한 감동이 마음을 짓누른다.
젊은 무용수를 선호하는 에이프만의 발레단은 이번에도 완전한 세대 교체를 이룬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새파란 무용수가 늙은 남편 카레닌의 포용과 고뇌를 완벽하게 묘사할 정도로 그 기량과 표현력은 대단했다. 이런 가운데 유일한 한국인 발레리나 최리나는 모든 면에서, 특히 생기 넘치는 표정에서 오히려 더 나은 모습이었다.
약점도 있었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쓰기로 했으면 일관할 것이지 종종 내면의 고통에 기계적인 음악을 쓰는 것은 종전의 에이프만에서 진화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음악공동체 무지크바움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