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간 이어져 온 풍산 류(柳)씨와 의성 김(金)씨 가문의 자존심 대결이 일단락됐다.
퇴계 이황 선생과 두 수제자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선생 종손들은 최근 김휘동 안동시장을 만나 중건을 추진중인 호계서원(안동시 임하면)의 위패 순서를 좌 서애 우 학봉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안동지역 유림들로 구성된 호계서원(경북도유형문화재35호) 중건추진위원회가 안동시에 중건신청서를 낸 것은 지난해 9월.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과 학봉(鶴峰) 김성일(1538~1593)은 둘 다 퇴계의 수제자다.
서애는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선조 임금을 모시면서 국난 극복에 공을 세웠고, 학봉은 임란 직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고 임란 때는 경상우도 초유사로 싸우다 병사했다.
호계서원은 안동 지역 사림들이 1573년 설립, 퇴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한 사액서원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쇠락, 강당과 주사(관리동)만 남아 있던 것이 임하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하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문제는 서애와 학봉 사후인 1620년 두 수제자의 위패를 사당에 함께 모시게 되면서부터 불거졌다. 당시 조정 서열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었으므로 가운데 퇴계의 위패를 세우면 다음 서열은 왼쪽, 오른쪽 순이다.
풍산 류씨 문중은 벼슬이 높았던 서애를 왼쪽이라고 주장했고, 의성 김씨 문중은 나이나 학문으로 볼 때 학봉이 왼쪽이라고 맞섰다.
양측은 경북 상주가 낳은 대학자인 우복 정경세에게 판단을 맡겼고, 우복이 서애의 손을 들어주면서 논란이 봉합되는 듯 했으나 이후에도 갈등은 계속됐다. 1805년에는 왕에게 상소까지 올라가는 등 시비가 이어졌다.
이후 서애 문중측은 호계서원의 위패를 병산서원으로 옮겼고 퇴계 선생은 도산서원으로, 학봉 선생은 임천서원으로 각각 옮겨 이 기간 동안 다툼은 사라졌었다.
그러던 차에 호계서원 중건추진위가 사당 등을 복원, 이들 셋의 위패를 함께 모시기로 하면서 서열문제가 다시 논란이 됐고 문중들은 어렵사리 합의를 이끌어 내게 된 것이다.
안동=권정식 기자 kwonj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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