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옥석을 가리기 위한 채권은행단의 평가가 또 다시 부실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채권단이 회생 가능하다고 분류한 기업이 법정관리를 신청하거나 부도를 내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5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채권은행의 건설업종 신용위험 평가에서 C등급(워크아웃 대상기업)을 받은 삼능건설과 송촌종합건설이 최근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개시 신청을 한데 이어 부도를 맞았다. 삼능건설은 1월 건설업종 1차 평가에서, 송촌종합건설은 지난달 2차 평가에서 각각 C등급으로 분류됐다.
앞서 2차 평가에서 C등급을 받은 중도건설도 부도 처리됐다. 1차 평가에서 B등급(일시적 자금난 기업)과 C등급으로 각각 평가된 신창건설과 대동종합건설 역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정부와 채권단은 그 동안 B등급에는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C등급은 채무상환 유예와 자구노력을 전제로 한 신규자금 지원을 통해 가능한 살리겠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그러나 기업평가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D등급(부실기업)으로 전락하는 기업들이 속속 생겨나면서 기업평가를 전담한 은행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즉, 은행이 당장의 손실 부담을 우려해 부실기업을 회생가능기업으로 잘못 평가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진짜 회생 가능한 기업에 자금 지원을 꺼려 멀쩡한 기업을 죽이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은행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지난달 말 채권단이 자금 지원을 논의했지만 제2금융권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해 기업회생절차를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채권은행 관계자는 "평가 과정에서 C등급 점수가 나온 업체에 D등급을 매겨 퇴출시킬 수도 없고, 향후 경기하강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제2금융권과 워크아웃 개시에 합의하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김태준 금융연구원장은 "채권금융기관이 구조조정을 주도하게 되면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부실기업 정리가 늦어지면 그 악영향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며 은행보다는 정부의 역할을 촉구했다.
그러나 정부 입장은 여전히 모호하다. "선제적 구조조정"을 외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최대한 살리면서 가보자"는 기조가 분명 정부 내에 공존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퇴출 기업을 대폭 확대하면 당장의 경기부양과 일자리 나누기 기조를 스스로 부정하는 딜레마가 발생할 뿐 아니라 나중에 해당 기업으로부터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면서 "따라서 가만 나둬도 부도가 날 '확실한' 기업에만 D등급을 주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은행을 탓하기 전에 정부가 먼저 입장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선제적 구조조정'이 맞는지, 아니면 '지원을 통한 살리기'가 맞는지 청와대 및 기획재정부의 책임 있는 결정이 있어야 실무부서와 은행들도 혼선 없이 업무에 나설 수 있다"면서 정부의 명확한 방향 제시를 촉구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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