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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옛터'의 이애리수 하늘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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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옛터'의 이애리수 하늘무대로

입력
2009.04.0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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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한국인이 만든 첫 가요인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ㆍ본명 이음전)씨가 3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황성옛터'는 전 국민의 노래가 됐지만 막상 그 노래를 불렀던 고인은 1930년대 이후 무려 80여년 동안 생사가 확인되지 않다가, 지난해 경기 일산 백석동의 한 요양시설에서 가족과 간병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는 사실을 한국일보가 특종보도(2008년 10월 28일자 13면)하면서 커다란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경기 개성 출신인 고인은 연극배우인 외삼촌을 따라 9세부터 순회극단 무대에 섰다. 18세이던 1928년 극단 취성좌(聚星座ㆍ이후 조선연극사로 개칭)의 공연이 열린 서울 종로의 단성사 무대에 올라 '황성옛터'(당시 제목은 '황성의 적'ㆍ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를 부르며 정식 가수로 데뷔했다.

그 무대에서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로 시작하는 노래를, 나라 잃은 설움을 담아 구슬프게 부르는 고인의 목소리에 무대 주변은 금세 숙연해졌고 관중들은 모두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일제 순사들이 공연 관계자들을 종로경찰서로 붙잡아가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황성옛터' 공연 이후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 고인은 1931년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취입한 '메리의 노래' '부활' 등 번안곡을 부르며 명성을 날렸고 1932년 빅타 레코드사에서 '황성의 적' 음반을 발매,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5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가요 관계자들은 이 정도 판매량은 현재의 인구비례로 따졌을 때 500만장 수준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고인은 서양 이름인 '앨리스'에서 따온 이애리수를 예명으로 해서 활동하다가 1930년대 중반 돌연 연예계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했다.

22세 때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던 남편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탑골공원에서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후 가수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남편과 혼인했던 게 잠적의 이유로 추정됐다.

이후 고인은 대중매체에 일체 나서지 않은 것은 물론, 2남 7녀의 자녀들이 장성할 때까지도 본인이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임을 밝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베일 속에 과거를 숨겨왔다.

지난해 10월 본보 인터뷰를 통해 세상으로 다시 나왔던 고인은 휠체어에 의지했지만 하루 세 끼 식사를 챙길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신문사에서 찾아왔다"는 아들의 말에 짧게 "몰라"라고 만 답했던 것이, 고인이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육성이 됐다.

유족은 장남 배두영씨와 7녀가 있다. 빈소는 경기 분당서울대병원에 마련됐다. 발인 3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 용인 가톨릭공원묘지. (031)787-1500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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