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새벽 6시30분. 한나라당 이재오 전 의원이 새벽 어스름을 헤치며 서울 은평구 구산동 자택 앞을 나섰다. 파란색 등산복 차림인 그의 표정이 밝다.
역촌동 뒷산인 덕산으로 발길을 향했다. 마주치는 주민들에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놓치지 않았다. 덕산 약수터에서는 할머니들이 건넨 국수로 아침을 대신했다. "못 볼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좋구만요". 덕담이 오간다. 이 전 의원은 "고맙다"며 두 그릇을 뚝딱했다.
20여년간 계속해온 이 전 의원의 아침 일정이다. 월,화,수는 자전거를 이용해서, 목,금,토는 등산으로 지역구를 누빈다. 지난달 28일 귀국했지만 벌써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전 9시30분. 자택으로 돌아온 그에게 딱딱한 질문 몇 가지를 던졌다. "당분간 현실정치를 멀리하겠다"는 귀국 일성의 의미부터 물었다. 이 전 의원은 "이명박 정부가 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말로 돕는 방법이 있고, 침묵으로 돕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당 지도부, 이상득 의원 등과 만날 거냐고 묻자 "급할 거 없다. 때가 되면 천천히 만나게 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당분간 정치인은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 만나면 또 이런저런 정치적 해석이 나올 것 아니냐"고 했다.
이 전 의원은 4월부터 잡혔던 대학 강연 일정도 4ㆍ29 재보선이 끝난 뒤인 5월로 미뤘다.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현실정치를 멀리할 '당분간'의 기간을 묻자 "그게 언제인지 알면 당분간이 아니다"고 했다.
가장 민감한 당내 현안인 경주 재선거 문제를 꺼내봤다. 정치 현안은 묻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순리대로 잘 되겠죠"라는 말이 겨우 들을 수 있는 답이었다. 미국으로 떠난 데 대한 섭섭함은 없었냐는 물음에 이 전 의원은 웃었다.
"다 내 잘못이다. 남 탓할 일이 아니다. 내가 모든 것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생긴 일인데…"라고 했다. 과거에 보여줬던 거침없고 공격적인 언사는 찾기 힘들었다. 이 전 의원은 "한동안 한강다리와 무악재를 넘지 않겠다"며 지역구에만 머물겠다는 의지도 거듭 강조했다.
이 전 의원은 이날 자신이 다니는 세광교회 목사에게 귀국 인사차 잠깐 들른 뒤, 점심 때가 다 돼 지역구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2,3명의 지역 인사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귀국 직후와 달리 손님이 많지는 않았다.
10월 재보선 출마 여부를 물어봤다. 그는 "선거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말하는 게 도리가 아니다"고 했다. 지인들과 점심을 한 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후 시간 대부분을 그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공부와 '나의 꿈, 조국의 꿈' 책 집필에 몰두했다. 이 전 의원은 이날 서부면허시험장을 찾아, 필기시험에도 응시했다. 미국에서 딴 운전면허를 사용하려면 필기시험을 다시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90점으로 합격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손수 운전도 했다.
이 전 의원의 요즘 하루는 번잡하지 않았다. 동행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안착하고 있다는 말이 좋은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바람대로 조용한 행보가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지 지켜볼 일이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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