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최은희 여사로부터 며칠 전 초대장을 받았다. 고 신상옥 감독 3주기 추모 행사 소식이었다.
문득 아주 오래 전 일이 떠올랐다, 홍콩의 한 호텔 로비에서였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최은희씨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나에게 호텔 관계자가 '아시는 분이냐'고 물었다. 한국 최고의 여배우라고 말하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1978년 초, 그녀가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이어 그녀의 남편인 신상옥 감독이 북한으로 향했다.
연이은 사건에 나는 머리에 총탄을 맞은 기분이었다. 최 여사와는 극단 '신협'에서 식구로, 신감독과는 배우로서 작업한 적이 있어 충격이 컸다.
두 분의 모습은 나에게 늘 '새로움'으로 다가온 터라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두 분의 일련의 '행동'이 그들의 '위험한 여행'이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들의 행동이 6.25 전란 등을 겪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최여사의 일생과 신상옥의 영화감독으로서의 경계가 없는 자유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신 감독은 매우 특이한 분이었다. 1973년 겨울, 6.25전쟁 영화 <13세 소년> 야외촬영장. 영하 10도가 넘는 추운 날씨였다. 최전방의 바람은 매서웠다.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도 전에 완전무장한 배우들과 스텝들이 준비를 완료하고 감독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스타 신성일 선배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 감독이 도착하자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 감독은 촬영감독이 있는데도 본인이 직접 카메라를 잡았다. 카메라는 쉬지 않고 돌아갔다. 해가 중천에 떴다가 다시 저물고 있었다.
하루 50컷이면 '촬영 끝'인 다른 현장과는 달리 이미 100컷 이상이 돌아갔다. 그러나 쉴 틈이 없었다. 추위에 온몸이 얼어가고 있었다. 새벽부터 나왔던 배우며 스탭들은 꽁꽁 얼어붙은 점심밥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군침만 삼키고 있었다.
누구 하나 감독에게 밥 먹고 하자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신성일 선배에게 물었다. "형, 배 안고파?" 그가 퉁명스레 뱉었다. "안고픈 놈이 어딨노?" 다시 그를 부추겼다. "감독님한테 밥 먹고 하자고 해."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런 말을 감독님한테 어떻게 하노?"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천하의 신성일이...?' 신성일 촬영 스케줄만 받으면 그게 바로 돈이던 시대에 그가 말 한마디도 떼지 못하는 사람이 신상옥 감독이었던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신성일 선배는 신 감독을 자신의 가장 큰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신 선배가 참다못해 나에게 말했다. "니가 해라. 밥 먹고 하자고." 모두들 나만 쳐다보았다. 누구도 입을 떼지 못 하고 있었는데 막내 격인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러던 중 내 눈에 카메라를 잡은 신 감독이 연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입 속에 넣는 모습이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치즈였다. 침이 꿀떡 넘어갔다. 나도 모르게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감독님, 저도 하나 주세요." 신감독이 놀란 듯 돌아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주머니에서 치즈 하나를 꺼내 쥐어 주었다.
신 선배가 급히 다가왔다. "하나 더 달라고 해라." 내가 웃으며 말했다. "형이 달라고 해." 그가 사정을 했다. "난 몬 한다." 나는 치즈를 그에게 주고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신감독에게 다시 다가갔다. "감독님, 저 배고파요." 카메라 파인더를 들여다보던 그가 돌아봤다. 내가 밥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다 얼어버렸어요." 그가 언 밥을 보더니 도리어 물었다. "왜 밥 먹지 그랬어...? 어서들 먹어."
촬영이 중단되고 모두들 얼어붙은 음식을 입 속에 넣기 시작했다. 신나게 배를 채우던 내 시선이 다시 한 곳에 꽂혔다. 신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뛰고 있었다. 노을이 걸린 산자락에 뜸북이 두 마리가 나란히 걷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는 이후 촬영 날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대신 배가 고프면 수시로 "감독님. 저도 주세요, 두 개요." 라고 손을 내밀었다. 하나는 신성일 선배 것이었다. 당연히 신 선배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신 감독이 다음 작품을 준비했다. <한강> 의 시나리오를 내게 보내왔다. 이미 난 스케줄이 짜여져 참여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신 감독의 제작책임자였다. 신감독의 지시라며 동트자마자 낙동강으로 내려와 달라는 것이었다. 잠결에 받은 전화라 꿈인가 하며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한강>
다시 벨이 울렸다. "감독님 바꿀게요." 잠시 후 신 감독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합니다. 빨리 와 줘야겠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몇 마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이튿날 신 감독 제작책임자가 내가 촬영 중인 현장으로 달려왔다. 내가 오지 않아 篤?팀이 서울로 철수했다는 것이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신 감독은 배우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며 중단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그를 만나러 갔다. 나를 보자 그는 다짜고짜 왜 현장에 안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스케줄은 듣고도 잊는 듯했다. 나는 오히려 그에게 사과하고 다음작품에서 함께 작업하기로 약속한 후에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막무가내 식 태도가 나는 싫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의 영화적 천재성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그가 북한으로 가기 전 마지막 만남이었다. 내가 감독으로 전향하고 1985년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영화제 측으로부터 그가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기대에 차 며칠을 더 체류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 했다.
이듬해 1986년 2월, 그가 베를린영화제에 나타났다. 그리고 3월 13일,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미국대사관을 통해 북한을 탈출 미국으로 향했다. 마치 아이들이 신나게 줄넘기 하듯 남과북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신상옥은 세계 어디에서도 영화에 관한 한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에게는 경계가 없었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그에게는 단지 거추장스러운 체제에 불과했다.
1990년 겨울 그와 다시 만났다. 영화진흥위원회 녹음실에서였다. 나는 영화 <혼자 도는 바람개비> 녹음을 하고 있었고 그는 미국에 체류하며 <마유미> 를 녹음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이었다. 10여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그는 여전히 젊었다. 마유미> 혼자>
그가 나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북한에서 내가 만든 <땡볕> 을 봤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마디 툭 내뱉었다. "조심해. 다음은 당신 차례야." 땡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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