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맛
단맛에 관한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린 시절 창문 너머로 훔쳐보던 사탕가게, 사루비아 꽃잎을 따서 한 방울씩 빨아먹던 꿀, 엄마 몰래 오도독 씹어 넘긴 커피 설탕. 가래떡을 찍어 먹던 조청이나 약밥을 만들기 위해 까맣게 녹인 흑설탕은 그 걸쭉한 모양새만 떠올려도 그리움이 피어난다.
오래 먹던 단맛은 정답다. 무언가 착한 일을 했거나 집안의 좋은 날에만 먹던 '상'같은 맛. 그렇게 가끔씩 얻어 먹던 단맛이 요즘은 생활 속으로 많이 들어왔다.
'단 것'은 몸에 나쁘다, 밥 먹기 전에 '단 것' 먹으면 입맛을 해친다, '단 것'먹으면 치아에 나쁘다는 잔소리는 이제 옛말. 시대가 변하여 사람들의 입맛이 점점 '단 것'을 선호하게 되었고, 대학가나 오피스 촌에는 어김없이 와플이나 도넛 등 달착지근한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성황이다.
길거리 떡볶이만 해도 예전보다 들큰해 진 것이 사실. "우리 학생 때 먹던 맛보다 달지?"라고 어른처럼 말하며 요즘 맛을 평가해본다.
요즘 음식이 달다고 투덜대기도 잠깐, 입맛이라는 것은 신기하게도 유행에 또 금방 맞춰지는데. 설탕 맛이 나서 입에 맞지 않던 떡볶이도 몇 달만 반복해 먹다보면 또 그런대로 그 맛이 익숙해진다. 예전에 먹던 닭갈비보다 훨씬 매운 '불닭', 예전에 먹던 간보다 밍밍해진 '된장찌개', 쏘는 맛을 줄이고 단 맛을 늘린 저 알콜 소주 등도 반복해 먹다보면 괜찮아진다.
그러니 힘든 시기에 모두의 입맛이 매워지면 어느새 나도 전에 먹던 간보다 맵게 먹고 있고, 철이 덜 든 키덜트 어른들이 늘어나면서 '단 것'은 애들이나 찾는 맛이라는 편견이 줄어 단 맛에 관대해졌으며, 전에 단 맛이 받던 구박을 요즘은 '짠 맛'이 오롯하게 떠맡으면서 장맛은 연해졌다.
■ 단맛은 감상적이야
중국의 추석에 해당하는 중추절에는 예부터 '월병'이라는 이름의 과자를 먹었다. 밀가루로 만든 겉 피, 달착지근하게 만든 소로 이뤄지는데 소의 재료는 지방마다 다르다.
입에 착 붙는 팥소에 각종 견과류를 섞을 수도 있고 말린 과일을 넣을 수도 있다. 소동파가 '월병'을 가리켜 '작은 과자가 마치 달을 씹는 것 같은 맛이다'라는 시구를 지었다니, 중추절 달을 보며 먹는 동그란 과자의 단 맛이 시인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달게 만든 과자는 일본에도 많이 있는데, 특히 짙게 우린 녹차와 함께 먹는 과자들은 그 크기가 손톱 만하지만 엄청 달다. 쓴 홍차나 쓴 에스프레소 커피에는 설탕을 넣어 녹여 먹지만, 쓴 맛이 강한 진녹색의 말차(가루 녹차)를 진하게 우린 차는 쓴 차를 그대로 마시고, 설탕만큼 달큰한 과자를 따로 먹는다. 한약을 먹고, 설탕으로 조린 생강이나 과자를 먹는 것처럼.
우리 음식인 불고기가 '야키니쿠'라는 이름으로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지는 이미 오래. 하지만 단맛을 선호하는 그들의 입맛에 맞추다보니 '야키니쿠'는 '불고기'보다 훨씬 달다.
냄비에 간장 양념을 자작자작 끓이고 즉석에서 고기를 익혀 먹는 '스키야키'라는 전통요리의 경우 야키니쿠보다 한 단계 더 달다. 특히 교토에서 먹는 스키야키는 아예 손님이 보는 앞에서 달인 간장 위로 설탕을 훅 뿌리고 고기를 넣어 익히니, 그 달콤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부르고뉴에 한 가지 더 특산물을 꼽으라면 '꿀빵'이 있다. 와인의 유명세에 가려져 덜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 내륙 지방의 꿀은 참 맛있다. 꿀 생산량이 많아 꿀로 아예 반죽을 해서 만든 빵을 먹을 정도. 파리를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에 들렀는데 '꿀빵'을 팔고 있다면 부르고뉴에 가까워졌다는 증거다.
■ 단맛 찾기
십 여 년 전만 해도 단 맛은 '얼라'들만 먹는 것이라 여겼다면, 이제는 불황 가운데 잠깐이나마 동심을 찾으려는 어른들이 앞장서서 단맛을 찾고 있다. 그 단 맛의 종류가 너무 서양 문화권의 것들로만 채워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안타깝기도 하지만. 벨기에 식 와플에 시럽을 뿌리든, 뉴욕 식 도넛에 설탕을 뿌리든 입맛은 자유라지만 둘러보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원래 드시던 단 맛이 얼마든지 있다.
앞서 말했던 약밥도 그렇지만, 강원도 꿀 한 스푼에 뜨거운 물을 부어 저은 꿀 차, 입맛을 정리해주는 감주, 달콤한 대추차, 한 입 물면 꿀이 쭉 쏟아지는 꿀떡, 누룩의 단 맛이 그대로 배어나는 교동 법주, 꽃물을 들인 핑크빛 녹말 국수를 익혀 꿀물에 말아 먹던 '청면', 초여름에 열리는 앵두를 설탕에 재웠다 만들어 먹는 앵두화채, 생강을 섞은 설탕물에 익힌 배를 띄워 그 국물과 함께 먹는 '배숙' 등 생각나는 대로 읊어보아도 끝이 안 난다.
오래 된 단맛, 우리가 본래 먹던 은근한 단맛은 좋은 날 새로 지은 한복을 입으신 우리 할머니만큼 곱다.
음식 에세이 <밥ㆍ시> 저자 밥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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