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春雪)이 한겨울 폭설처럼 쏟아지는 계곡(뱀사골)을 지나 하늘을 향해 뻗은 굽이길을 30여분 달렸을까. 그 사이 들고 나는 차량은 한 대도 없었다. 길이 좁아지고 고비(성삼재)가 시작되는 곳에 이르자, 밥 짓는 연기가 가늘게 피어 올랐다.
지리산에서도 오지로 통한다는 전남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거기서도 심원마을은 옆으로 돌면 반야봉(1,732m)이요, 돌아서면 노고단(1,507m)인 해발 750m의 '하늘 아래 첫 동네'다. 주변 수㎞ 이내에 사람 사는 마을이 없고 깊은 곳에 자리잡았다 해서 '심원(深遠)'이다.
마을 식구라고는 고작 21가구 54명. 봄이면 산나물을 캐서 손님 밥상에 올리고, 이들에게 하룻밤 묵을 잠자리를 내주는 것으로 먹고 산다고 했다. 이곳 주민들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살아서인지 좀체 화를 낼 줄 모르는 서글서글함과 넉넉한 인심을 지녔다.
그런데 최근 이 순박한 산골 사람들이 단단히 뿔이 났다. 환경당국의 섣부른 마을 이주계획 발표로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생계가 막막해졌기 때문이다. 1일 낮 심원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동네 사람들 다 굶어 죽게 생겼다"며 새된 목소리를 냈다.
"누가 마을을 옮겨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이주시킨다고 떠들어대더니 아직까지 나 몰라라 하고 있어. 그게 벌써 4년째여. 그런 통에 밖에서는 심원마을이 사라진 줄 알더라고. 그러니 손님들 발 길이 끊길 수밖에." 마을 초입에서 민박 '심원 첫 집'을 운영하는 신정화(73)씨는 "현상유지는커녕 빚내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다"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4년 전만해도 심원마을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이름값 덕분에 주말 하루 평균 2,000여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 들어 '돈 긁어 모으는 곳'으로 통했다. 여름 한 철 장사로 한 집에 5,000만~7,000만원 벌기가 예사였다. 주민들은 "마을 주변에서 노점 하던 사람들도 하루 일이 끝나면 돈을 꽉꽉 눌러 담은 마대자루 2개씩은 챙겨서 산을 내려갔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나 2006년 4월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 남부사무소가 마을 이주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 마을이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공단 측이 "산사태와 하천 범람 등 재해 위험이 큰 데다, 식당 운영에 따른 오염원 발생을 막고 자연환경도 복원하겠다"며 마을 이주 계획을 알리면서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은 것이다.
고향산장 주인 김학철(62)씨는 "주말이면 집집마다 차 댈 곳이 없을 정도였는데 보다시피 지금은 파리만 날리고 있다"며 "수입이 거의 없다 보니 매달 80만원 이상 나오는 전기세를 어떻게 낼까 궁리하는 게 일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김씨의 사정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S산장을 운영하는 김모(59)씨는 생계기반을 잃어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생활비를 대고 있다. 그는 "5년 전 3억5,000만원의 농협 대출을 받아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제 이자 갚기도 벅차다"며 "이곳 주민 대부분이 수 억원의 은행대출을 끼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2년 안에 마을 주민 80%는 거덜이 날 것"이라고 걱정했다. 실제 산장 3곳이 이미 문을 닫거나 건물을 팔려고 부동산 업소에 내놓은 상태였다.
이처럼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부도 직전에 몰렸지만, 정작 공단의 마을 이주 계획은 확정된 게 하나도 없다. 공단 측이 정부에 예산(242억9,700만원)을 요청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푼도 확보하지 못했다.
수년째 말로만 이주사업을 벌여온 것이다. 공단 관계자는 "환경부가 추진 중인 북한산과 지리산 등 국립공원 내 이주복원사업의 우선 순위에서 밀리다 보니 예산확보가 어려워 심원마을 이주사업이 지지부진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민들 대부분은 공단 측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주보상 평가를 낮추려고 주민들을 고립시키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게 주민들 생각이었다.
"이주계획을 흘려 손님들이 등지게 만들어 놓고 영업손실보상비, 이주보상비 등을 낮추거나 영업난에 허덕이는 주민들이 제풀에 지쳐 마을을 떠나게 하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청기와집 주인 이무익(68)씨는 "주말이면 공단 직원들이 마을을 돌면서 손님이 얼마나 있나 차량 대수를 세고 다닌다"며 "이게 뭘 뜻하는 지는 뻔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마을 등산로 폐쇄도 주민들 속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공단 측이 그 동안 마을에서 반야봉과 천왕봉, 노고단으로 가는 등산로를 폐쇄하고도 산채나 약초를 캐러 가는 주민들에게는 통행편의를 봐줬는데, 몇 년 전부터 반달가슴곰 보호를 이유로 통행 시 벌금(60만원)을 물리겠다고 나선 탓이다.
주민들은 "우리가 곰만도 못한 사람들이냐" "장사를 망쳐놨으면 산나물이라도 캐서 먹고 살게 해줘야지, 우리보고 죽으란 말이냐"고 언성을 높였다.
설상가상으로 구례군이 산동온천지구~성삼재 또는 노고단 케이블카를 설치하기로 하면서 주민들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 처지에 빠져들고 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순박하던 이곳 사람들도 그예 일을 낼 태세다.
눈발이 날리는 주차장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내뱉던 이씨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보상비를 많이 받으려고 이주를 못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마을을 죽여 놓으면 되겄소? 이제 우리도 악다구니밖에는 안 남았소. 당장 어떤 조치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촌사람들이 보여줄 테니 두고 보시오."
구례=글·사진 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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