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다. 선거를 치르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 본부에서 현장으로 '실탄'을 내려보낸다. 유권자 1인당 100원을 준다고 하고, 100명의 유권자를 포섭하려면 얼마를 마련해야 할까. 물론 1만원은 아니다. 일선조직책에게 2만원이, 중간조직책에게 4만원이 전달되려면 본부 금고에선 8만원 이상이 나가야 한다. 본부 자금의 10%만 유권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면 선거에서 이긴다는 것이 정치권의 불문율이다.
정치꾼들의 행태이고, 공짜 돈이니 그랬다 치자. 전달자들 모두가 '무급 자원봉사자'이니 인건비도 감안해야 했을 터. 그런데 복지예산이 공무원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면서, 밝혀진 사례만 해도 수십억원의 누수가 있었다고 한다. 올 2월 서울 양천구청에서 한 공무원이 26억 넘게 빼먹은 사실이 발각됐다. 이후 대부분의 지자체들이 자체적으로 혹은 감사원을 통해 조사를 받고 있는데, 이리저리 빼먹은 행태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드러나고 있다.
복지예산 받는 건 시혜 아닌 권리
지방에 혼자 살고 있는 한 할머니가 있다. 매달 군청에서 10만원 조금 못 되는 현금을 받고, 교통비로 몇 만원을 더 받는다고 했다. 군청 식당에 가서 1,000원만 내고 푸짐한 점심도 먹는다. 그 할머니는 돈을 주는 군청 공무원과 밥을 주는 군청식당 관리인을 구세주인 양 여기며 감사해 한다.
주위에서 "이런 저런 신청을 하면 돈을 좀더 받을 수 있다"거나, "다른 곳에선 그냥 식사를 준다더라"고 말을 붙이면 "그것도 고마운데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친다. 행여 주위에서 담당 공무원에게 따지기라도 하면 그것마저 못 받게 될까 염려하고 있다.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정부가 주는 돈을 이렇게 시혜로 여긴다면 문제다. 소년소녀 가장, 빈곤층 자녀, 저소득 장애인 등 복지예산의 수혜자들 대부분이 그렇다. 예산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이 알아서 챙겨주는 은전(恩典)으로 여긴다. 거꾸로 공무원들은 마치 자신들이 산타클로스나 동네의 '김 부자'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수혜자들은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돈을 받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요구해야 한다. 복지예산은 대통령이나 장관, 지자체장이나 일선 공무원들이 그저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모인 국가의 돈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젊은 시절 이 땅에 뿌렸던 땀과 눈물의 과실이며, 스스로 숱하게 지불했던 세금과 비용의 일부분이다.
소년소녀 가장, 빈곤층 자녀, 저소득 장애인 등도 마찬가지다. 당장 냈거나 내고 있는 돈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언젠가는 국가에 내게 될 비용이며, 자신의 주변과 동시대 구성원들이 함께 갹출해 모은 돈임을 알아야 한다.
속속 드러나고 있는 파렴치한 공무원들이 그러한 행태를 계속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떳떳하고 당당한 권리 주장'은 필요하다. 공무원은 공복(公僕)으로 국민의 심부름꾼이다. 그들은 선거용 정치자금을 나눠주는 '무임금 자원봉사자'가 아니며, 선량한 독지가도 아니다. 국민세금을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심부름이 직업인 사람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택배회사 직원'과 다르지 않으며, 소비자는 물품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따져볼 권리가 있다.
주는 대로 받지 말고 잘 따져봐야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이후 복지예산은 크게 증가했고, 최근 빈곤층이 급증하면서 국가가 이들에게 주는 돈의 액수와 종류가 급증하고 있다. 정부의 예산이 제대로만 전달되면 힘든 이웃들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적지 않은 힘이 될 것이다. 무슨 돈을 어떻게,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배달되는 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 불량한 심부름꾼들이 적지않기 때문이다.
수혜자 본인이든, 주변 친지들이든 '희망전화 129'에 문의도 하고, 해당관청 민원실에 쫓아가 확인하고 따져야 한다. 부패한 공무원들을 솎아내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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