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불출(杜門不出). 사방에 봄기운이 완연한데 봉하마을은 아직 겨울이다. 언론은 노무현 전 대통령 자택 주변을 인적마저 드문 쓸쓸한 풍경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어쩌면 몰아칠 '폭풍'을 예비하고 있는 것처럼.
살아있는 권력을 놔두고 죽은 권력, 이미 퇴임해서 낙향한 전직 대통령 얘기를 하려니 썩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다. 퇴임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신문 지면은 온통 '노무현' 석 자로 장식되고 있으니.
그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한테서 부정한 돈을 받았는지는 검찰에서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이미 드러난 측근들의 비리만으로 그는 할말이 없게 됐다. 그에 대한 온갖 비난과 덧씌우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특권 타파' 노력과 도덕성에 높은 점수를 주었던 지지자들에겐 안타깝고 실망스러운 일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돼온 '푸닥거리'가 이번에는 재연되지 않을 줄 알았던 많은 이들은 순진한 바보가 되고 말았다.
지금 그의 편은 없다. 고립무원 상태에 빠졌어도 손을 내미는 이가 없다. 누굴 원망할 것인가. 정치보복이라고 탓할 것인가. 정권이 바뀌자마자 '후원자'인 박 회장에 대해 국세청이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벌이고, 그 결과를 받아 검찰이 수사에 나섰으니, 치졸한 정치보복이라고 항변할 것인가.
물론 냄새는 물씬 난다. 단순한 정치보복이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세력화를 막기 위한 현정권의 선제적 타격으로 짐작해 볼 여지도 충분하다. 그가 퇴임 후 활동을 준비해왔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정치활동 재개 가능성도 여러 차례 거론됐다. 여권은 이러한 그의 행보가 못마땅했거나, 정치적 부담으로 여겼을 법하다.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말할 것도 없이 퇴임 후 활동에 필요한 돈줄을 죄는 것, 즉, 후원자를 치는 것이다. 실제 노 전 대통령은 이번 수사로 사실상 '정치적 불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현정권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것이 노 전 대통령 주변의 비리를 덮어주지는 못한다. 설마 이럴 줄 몰랐다고 할 텐가. 그렇다면 여권은 뭐라 답할까.'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이러지 않을까.
물론 노 전 대통령이 이 같은 상황을 경계하지 않았다고 보진 않는다. 더구나 도덕성을 자신의 정치적 푯대로 삼아온 그가 직접 부정한 돈을 받았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돌이켜보면, 노 정권이 박연차라는 '통 큰' 기업인에게 '후원자'라는 꼬리표를 허용한 때부터 비리는 잉태되었는지 모른다. 박 회장과 비교되는 것조차 싫어 한다는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도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그 역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처럼 공공연히 후원자를 거느린 대통령은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들이 후원자나 측근으로 불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들과의 관계를 엄격히 정리한 것도 아니다.
대통령의 친인척과 그 주변을 감시해야 할 청와대 민정수석이 박 회장한테서 금품을 받은 사실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서로 동향이면서 친분으로 얽힌 인사를 그들의 감시자로 앉힌 것부터 잘못이었다.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을 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죽은 권력의 잘못을 파헤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은 아니다. 지금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적어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상철 사회부 차장 s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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