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기운을 좇아 섬진강 주변을 헤매다가 정말 귀하고 고마운 풍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을 알게 된 것이다. 섬진강에 흘러드는 지류 중 가장 큰 물줄기인 보성강. 전남 보성군 일림산에서 시작해 호남 땅을 한바퀴 크게 휘돌아 곡성군 압록의 두물머리에서 섬진강과 몸을 합치는 강물이다.
강의 시작점은 남해 바다와 아주 가깝다. 산등성이만 넘으면 바로 대양으로 치달을 물줄기가 북쪽 내륙으로 달리 방향을 잡고 보성의 들판, 곡성의 골골을 헤집다가 섬진강에 올라타선 결국 느지막이 바다로 빨려 들어간다.
바다 냄새를 맡고 시작한 물줄기라 그런 걸까. 강으로서의 수명을 짧게 끝내지 않으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멀리 에둘러 흐르는 강물은 그 물길의 경사도 최대로 눕혀 속도를 줄이고 또 줄인다. 그래서 보성강물은 정지한 듯 호수처럼 고요하다.
지금 웬만한 강줄기들은 죄다 인공 수로처럼 콘크리트 둑으로 갇혀 있는데 보성강은 숲이 우거지고 모래사장이 펼쳐진 '강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두물머리 압록에서 보성강을 따라가는 국도 18호선을 타고 차를 몰다 얼마를 멈춰섰는지 모른다.
차창 밖 풍경이 자꾸만 손짓하면서 멋진 포즈를 취하는데,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는 못 배길 그림들이었다. 갈짓자로 휘는 강물 위로 매화꽃이 드리우고, 무성한 대숲이 물 위에 초록의 그림자를 풀어낸다. 비 갠 뒤 먼 산에서 뿜어올리는 안개는 또 그대로 정한 물 위에 같은 그림을 그려낸다.
'원형의 강물'은 또 '원형의 숲길'을 안내한다. 드라이브길 중간 순천 월등으로 향하는 840번 지방도로로 빠지면 태안사가 나온다. 절 입구에서 일주문까지 오르는 1.8km의 숲길.
작은 계곡을 따라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터널 속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아늑한 길이다. 이 길 끝 해발 753m 동리산 자락에 지나온 보성강만큼이나 숲길만큼이나 아름다운 절 태안사가 있다.
신라 말 선불교를 일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종찰이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숲길 끝에서 방문객을 맞은 건 다리 위에 누각을 씌운 능파각(凌波閣)이다. 이끼 가득한 바위를 스치고, 때론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 위에 다리 누각이 올라섰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교각이나 상판이 비에 젖지 말라고 지붕을 올리는 건 유럽이나 미주에선 흔한 옛 다리 형식이지만 국내선 보기 드문 다리 구조다. 이 능파각이 외국의 지붕 올린 다리와 다른 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전각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능파각에 앉아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담양 소쇄원의 광풍각이 부럽지 않다.
능파각은 속세를 벗어나 도량으로 들어서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 '능파'는 '물결 위로 가볍게 거닌다'는 뜻. 능파각은 그렇게 속세와 부처의 땅을 가볍게 연결시키고 있다. 능파각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진 오솔길도 아름답다.
200m쯤 되는 돌계단 길도 '길이 족히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듯한 매혹적인 길이다. 일주문 옆으로 초록 대숲 그늘 아래 부도밭이 있다. 태안사의 긴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긴 윤다 등 많은 스님들의 혼이 깃든 공간이다.
태안사 안쪽에는 누구든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문이 있다. 자신을 낮춰야만 들어설 수 있는 문, 배알문이다. 구산선문을 일으킨 혜철의 법신을 모신 부도탑으로 오르는 계단 끝에 있다.
능파각 옆에는 사찰과 어울리지 않는 경찰충혼탑이 우뚝 솟았다. 한국전쟁 때 곡성 사수를 위해 태안사에 모인 경찰 47명이 북한군의 기습으로 이곳에서 참혹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그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탑이다. 태안사 주차장 인근에는 곡성 출신 시인 조태일의 문학기념관이 있다.
곡성=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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