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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기업인' 양정모 前 국제그룹 회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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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기업인' 양정모 前 국제그룹 회장 별세

입력
2009.03.3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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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기업인'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꿈에도 그리던 '그룹 재건'을 보지 못한 채 29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고인은 노환에 따른 폐렴증상으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고인은 늘 그룹 재건을 꿈꿨으나 "사업 안 하니 신경 안 쓰고 좋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서울과 부산 집을 오가며 장남이 운영하는 회사에 가끔 나가는 것 말고는 주로 지인들과 골프와 등산 등을 즐겼으나 지난해 말 이후 몸 상태가 급속히 나빠졌다.

부산 태생인 양 전 회장은 1949년 설립한 국제고무공업사를 기반으로 1980년대 재계 서열 7위의 '국제그룹'을 일궈낸 '자수성가 형' 기업인이다.

고인은 '왕자표 신발'을 만들어 히트 시켰고 1950년대 중반 무렵까지 100개가 넘는 생산 라인을 갖춘 세계적 신발 공장으로 키워냈다. 62년 국제 신발은 국내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 75년 종합상사로 지정됐다. 이듬해 국제상사 회장직에 취임한 고인은 중화학 업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70년대 초 신발 수출 붐을 타고 성장을 거듭하던 고인은 이후 성창섬유, 국제상선, 신동제지, 동해투자금융 등을 창업하고 동서증권, 동우산업, 조광무역, 국제토건, 국제종합엔지니어링, 원풍산업 등을 인수해 재계 서열 7위의 '재벌'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공든 탑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85년 2월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이 자금난에 빠진 국제그룹의 정상화 대책을 발표한 뒤 곧바로 그룹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국제상사는 한일합섬에, 건설 부문은 극동건설에 매각되는 등 그룹은 1주일 만에 공중분해 됐다. 무리한 사업 확장에 과도한 단기 자금 의존, 친족 경영과 파벌 싸움 등이 원인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전두환 정권에 미운 털이 박혀 희생됐다는 분석이 정설처럼 알려졌다.

'국제그룹이 재계 7위임에도 마지못해 3개월짜리 어음으로 10억원을 헌금으로 상납했다', '폭설로 청와대 만찬에 늦게 나타났다', '1985년 2.12 총선에서 부산 지역 상공인 대표였던 양 회장의 협조가 부족했다' 는 등 최고권력층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뒷받침하는 소문들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고인은 5공화국이 끝나자 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는 헌법소원을 냈고, 93년 7월 29일 헌법재판소는 "정부의 공권력 행사가 기업 활동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양 전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흩어진 기업들을 되찾기에는 너무 늦었다. 고인은 94년 한일합섬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 인도 청구 소송에서 패소했다. 정부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했지만 이로 인해 개인 간의 계약까지 무효가 될 순 없다는 논리였다.

15년 넘게 고인을 수행했던 김모(72)씨는 "설렁탕과 회를 좋아하고 직원의 허물을 감싸주던 분이었지만 회사 돈을 횡령하거나 게으른 직원은 가멸차게 꾸지람하셨다"고 회고했다.

유족으로 장남 양희원 ICC대표와 사위 권영수 LG디스플레이 대표이사, 이현엽 충남대 교수, 왕정홍 감사원 행정지원실장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영안실, 발인은 4월 1일 오전 9시.(02)3010-2631

박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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