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한국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ㆍ1950.4.29~2006.5.25)를 처음 만난 것은 <프라하의 소녀시대> (원제 '거짓말쟁이 아냐의 진홍색ㆍ眞紅色 진실')에서였다. 프라하의>
일본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은 2001년이지만, 한국어판이 나온 것은 2006년 11월이므로, 저자가 죽은 지 몇 달 뒤에야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일종의 수기라 할 <프라하의 소녀시대> 는 1960년대 전반 요네하라 마리가 체코의 프라하에서 소비에트학교(외교관들이나 공산당 간부의 자제를 위해 소련 대사관이 운영했던 국제학교다. 프라하의>
저자의 아버지는 일본공산당 간부였다)에 다닐 때의 추억을 현재와 포개고 있다. 그 시절 친구들인 그리스 출신의 리차, 루마니아 출신의 아냐,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야스나를 찾아가 만나는 과정이 책의 후반부를 이룬다.
내게 이 책의 재미를 배가시켜준 것은 시공간적 배경이었다. 1960년대 전반의 프라하! 그곳은 한국인들에게 금단의 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때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특히 체코어와 러시아어를 함께 쓰는 외국인 소녀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 다른 곳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울고 웃고 화내고 즐기며, 그들만의 이채롭고 다감한 소녀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프라하에 처음 가본 것은 마리(당시엔 10대 전반의 소녀였으니, 친근한 척 이름만 한 번 불러보자)가 소비에트학교에 다니던 시절로부터 30년이 지난 뒤였다. 30년 전에도 그랬을 프라하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공산주의 체제의 흔적은 거의 사라진 뒤였다. 나는 <프라하의 소녀시대> 를 읽으며, 내가 가본 프라하의 풍치들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프라하의>
이 책에서 특히 가슴 뭉클하게 펼쳐지는, 마리가 야스나를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는 내가 가본 베오그라드의 정겨움이 저절로 떠올랐다. 나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대한 요네하라의 견해가 나와 비슷해 기뻤다. 전쟁에서 선악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유고내전에서 반인도범죄를 저지른 것은 세르비아인들만이 아니었다.
요네하라 마리는 이 책으로 제33회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순전한 논픽션은 아닐 것이다. 40년 전의 일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더구나 그것이 짧지 않은 대화 내용 같은 것이라면. 요네하라 마리는 아마, 약간 선의의 분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이 허용하는 한 최대의 정직성을 발휘했음이 분명하다. 예컨대, 배우 알랭 들롱이 유고 출신이어서 미남이라는 한 친구의 주장이 그대로 마리의 지식이 돼 인용되기도 한다(들롱은 파리 남쪽 교외 소ㆍSceaux 라는 곳 출신이다).
요네하라는 프라하 시절의 감회를 남기는 데 이 수기로는 성에 안 찼던지, 소비에트 학교의 무용 교사를 모델로 삼아 <올가의 반어법> 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올가의>
요네하라 마리의 직업은 일본어와 러시아어를 오가는 동시통역사였다. 세상에는 수천, 수만의 직업이 있지만, 그 가운데 타고난 재능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가 동시통역사 노릇일 게다. 그(녀)에게는 둘 이상의 언어 능력과 방대한 영역의 지식만이 아니라, 임기응변의 민첩함, 긴장감을 견딜 수 있는 결기, 집중력 같은 것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소녀시절 프라하에서 배운 러시아어를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계속 전공했고, 마침내 일본 제일의 러시아어 동시통역사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직업에 아쉬움이 있었나 보다. '글은 남고 말은 날아간다'는 속담이 가리키듯, 통역사의 노동은 대개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으로 사라진다.
반면에 번역가의 노동은 기록으로 남는다. 기록으로 남지 않는 자신의 노동을 보상하기 위해 요네하라 마리는 문필가가 됐는지 모른다. <프라하의 소녀시대> 이후 쏟아져 나온 그의 한국어판 책들은, 56세에 난소암으로 작고한 이 여자의 본업이 동시통역인지 문필업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프라하의>
요네하라 마리의 책들을 출간한 출판사 쪽 얘기를 들어보면, 그녀의 작품이 앞으로도 계속 한국어로 나올 모양이다.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 나는 그저 그녀의 다른 책들이 빨리 번역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간 번역돼 나온 그녀의 책들은 다 읽었다. 그 책들은, 앞에서 언급한 책들을 빼면, <마녀의 한 다스> <미녀냐 추녀냐> <대단한 책> 따위다. 대단한> 미녀냐> 마녀의>
<마녀의 한 다스> 와 <미녀냐 추녀냐> 는 통역사로서의 경험이 없으면 쓰기 어려운 책이다. 서로 다른 문화가 접촉할 때 생기는 정신의 불꽃들을 경쾌한 문체로 그려냈다. 미녀냐> 마녀의>
통역사(번역가도 그렇겠지만)는 두 문화에 걸터앉아 있는 보편인이다. 그(녀)의 노동에 힘입어, 서로 다른 문화는 겹치며 스며든다. <마녀의 한 다스> 는 서양에서 불길한 숫자로 여기는 13이 문화권에 따라서는 다른 함의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아, 문화들의 교차를 살핀다. 마녀의>
이 책을 떠받치고 있는 철학은 "의미는 서로 다른 문화가 교차하는 순간에 비로소 생긴다"는 바흐친의 말이다. 사실, 의미란 곧 차이라는 것은 언어학의 기본 명제다.
이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은 경쾌한 문체 때문만이 아니라 은근히 '외설적인' 저자의 유머감각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저자는 한 언어에서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 낱말과 다른 언어에서 비속한 의미를 지닌 낱말이 비슷한 음상을 지닌 경우의 예를 자주 든다.
특히 통역하면서 거듭 거론해야 하는 사람 이름이 다른 언어에서 성적 뉘앙스를 지녔다거나 아예 성기 이름과 비슷할 때, 통역사의 고민은 커진다. 청중들이 웃어대고 연사는 영문을 몰라 당황해도, 통역사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한다.
<미녀냐 추녀냐> 는 번역 이론에서 오랜 논쟁을 빚은 '부정한 미녀'와 '정숙한 추녀'를 주제로 통역만이 아니라 번역문제까지를 거론한다. 그것은 좁혀서 얘기하면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문제이고, 다르게 말하면 통역(번역)된 언어가 출발언어에 더 가까워야 하느냐 도착언어에 더 가까워야 하느냐의 문제다. 미녀냐>
직역한 언어는 출발언어(의 구조나 감성)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고(정숙한 추녀), 의역한 언어는 도착언어(의 구조나 감성)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부정한 미녀).
통역-번역자는 이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언어를 뒤쳐야 한다. 이 두 책은, 이론적 깊이랄 만한 것은 모자라지만, 특히 통역이나 번역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한 번쯤 읽어보아야 할 실천적 지침서다.
앞으로 계속 요네하라의 책이 번역돼 나올 테니, 또 어떤 보석이 끼어있을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번역된 책 가운데 독자에게 한 권만 추천하라면, 나는 <프라하의 소녀시대> 와 <대단한 책> 사이에서 망설일 것이다. <대단한 책> 은 책에 대한 책이다.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논평 모음. 본격적 서평도 드문드문 눈에 띄지만, 대개는 짤막한 감상문이다. 대단한> 대단한> 프라하의>
이 책은 요네하라가 얼마나 바지런한 독서가였는지를 보여준다. 전공이 러시아학이므로 러시아에 관한 책이 드물지 않게 논평 대상이 되지만, 그녀가 읽고 평한 책은 온 세상 정경문사철의 경계를 넘나든다. 더구나 그녀는, 이 책에 모인 글을 쓸 때, 암과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암 투병 중이었던 만큼, 암치료법 책들에 대한 논평도 자주 보인다.
일본에도 한국처럼 그런 책들이 많이 나오나 보다. 그리고 그 책들 대부분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책임한 쓰레기인가 보다. 환자로서 그 책들을 읽은 요네하라가 낙심하는 모습이 여기저기 비친다.
여기 모인 글 가운데 하나는 그녀가 작고하기 이틀 전에 활자화됐다. 책 제목의 '대단한 책'에서 '대단하다'는 것은 그녀가 읽은 책들을 가리키겠지만, 내게는 바로 이 책이야말로 대단한 책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상복이 있는 사람이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 말고도 여러 책이 평판 있는 문학상을 받았다. 그게 나로서는 좀 의외다. 나는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책들이 상을 받을 만한 걸작들이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문체가 밋밋하고 상투적이다. 그녀가 문장가는 못 된다는 뜻이다. 프라하의>
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생채가 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뛰어나고 아름다운 문장은 아무리 못난 번역가를 만나도 그 생채의 일부를 남겨 독자에게 보여주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가 문장가가 아니라는 것은 그녀에 대한 평가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그녀의 책들이 보여주는 다감함, 날렵함, 섬세함, 유머감각 따위는, 요컨대 '에스프리'는, 여느 문필가가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있다. 나는 요네하라 마리의 충성스러운 독자다. 생전에 한 번 만나봤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숭배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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