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광인 나는 WBC 결승전의 아쉬움을 쉽게 달랠 수 있었다. TV를 보고 있는 내 머릿속엔 오직 한 사람의 위대한 그림자만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전날 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 될지도 모를 '그랜 토리노'를 본 것이다. '오손 웰스' 이후, 배우 출신 유명감독이 많이 있었으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특별하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1955년, 단역배우로 할리우드에 첫 발을 내딛는다. 1959년 TV시리즈 '로하이드'로 명성을 얻더니 1964년 '황야의 무법자'를 시작으로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 붐을 일으키며 '멋진 총잡이'로 스타덤에 오른다. 1971년, 40세 나이에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를 각본, 주연, 감독해 당당히 그의 영화세계를 넓혀가기 시작한다.
그의 초기 작품은 '황야의 무법자'류의 상업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그는 영화시장에서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자 1986년부터 '승리의 전쟁', '추악한 사냥꾼'등 문제작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장르 따위에 구애받지 않았다. 1993년 이후, '사선에서', '용서받지 못 할 자'등 사회성 짙은 작품과 베스트셀러 소설 '매디슨 카운티 다리'를 감독ㆍ주연하더니 절대 권력을 해부한 '압솔루트 파워'등을 발표하여 미국 권력층의 문제점을 들춰내기도 했다.
2003년, 젊은 스타 숀 펜, 케빈 베이컨, 팀 로빈스를 출연시켜 세 친구의 우정과 가정 그리고 사라진 순수의 아픔을 그린 '미스틱 리버'로 세계영화제의 상과 흥행을 싹쓸이, 70대라는 나이는 영화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길을 찾듯 가족애의 끈을 짚어낸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선 힐러리 스왱크를 불행한 복서로 출연시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고 그 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휩쓸어 그의 존재를 재확인 시켰다.
2006년, 2007년 2차 세계대전을 일본과 미국의 시각에서 고찰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아버지의 깃발'은 그의 관심이 얼마나 전방위적인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2009년, 과거 미국의 부패와 파괴된 여성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체인질링'을 내 놓았다. 안젤리나 졸리를 통한 그의 물음은 간단했다. '현재의 아메리카는 어떠한가?' 였다.
드디어 '그랜 토리노'를 내놓았다. 그는 이 작품에 임하면서 "나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라고 하였다. 내게는 그의 이 말이 마치 '이제는 끝장을 봐야 될 때'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깊은 밤, 나는 극장으로 달려갔다.
화려하고 신바람 나는 CF와 예고편이 끝나자 잠시 후 흑백의 워너브라더즈 마크와 함께 영화가 시작됐다. 장의 차량이 대기 중인 성당 외경. 장례미사가 진행되고 있는 몇 장면이 지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큰 얼굴이 관객을 압도했다.
그의 얼굴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너무도 무섭고 추악한 표정이었다. 반세기 이상 보아온 양미간을 찌푸린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이 얼굴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세상 모두를 증오하고 무시하는 얼굴이었다. 구토를 느낄 정도였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주인공 월터(클린트 이스트우드-분)는 집에 대형 성조기를 달고 살았다. 나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인공 월터를 통하여 미국의 현재와 바뀌어야 할 미래를 이야기하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계가 증오하는 미국 우월주의를 상징하기 위하여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특수분장까지 하며 최악의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할 수 있으면 작품의 엔딩까지 짐작해 보라는 당당함도 넘쳐흘렀다. 늙어서 꾸부정한 허리, 분노에 찬 눈을 번득이며 집 안팎을 서성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방향을 잃은 지금의 미국이었다. 그는 세계가 바뀌어져 가는 모습을 미국의 작은 한 동네주민이 백인이 아닌 타 인종으로 바뀌어가는 것으로 대비시켰다.
한국전쟁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포인트였다. 이 전쟁이 누구에 의해, 왜 저질러졌는지 묻고 있었으며 소년병까지 죽이며 살아 남아야 했던 광기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광폭한 자신에 대하여 '미친놈'이라고 자책하며 이유를 막론하고 무력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뉘우치기도 하였다. 그가 보기에 폭력이란 '어리석음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내게는 그가 미국의 뉴욕 9.11 테러에 대한 보복이 지나쳤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주인공이 한국전에 참전한 것과 월남전으로 인해 피해 받은 소수 민족 몽족을 작품 중심에 둔 것은 미국이 관여한 수많은 전쟁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여진다.
세계의 수많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팬들은 그의 마지막 출연에서 무엇이든 해결해 버릴 수 있는 멋?총잡이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총을 뽑지 않았다. 무력의 시대는 가고 평화와 화합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는 그의 외침은 단호했다.
그가 보복을 위해 폭력배들을 향해 가슴에서 뽑은 것은 권총도 아니었고 장난삼아 뽑은 손가락 총도 아니었다. 한국 소년병들을 죽였던 한국전쟁의 상징인 미전투사단마크가 찍힌 지포라이터였다.
그는 그 허망해 보이기까지 하는 손짓으로 미국이 1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하며 저질렀던 무모함과 오만함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미국을 상징한 '그랜토리노'를 유족이 아닌 몽족 소년 '타오'에게 줌으로써 미국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길을 제시하였다.
물론 이런 생각이 단순한 내 희망일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선택은 명료하다. 변화, 화해, 용서. 이제 '타오'가 월터에게서 선물 받은 그랜토리노를 몰고 아메리카대륙을 달린다. 동서가 하나가 된 그 화면 위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노래가 들려온다. 그는 우리 모두가 하나 된 것을 기뻐하며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청소하는 아저씨가 다가왔다. "다음 회 손님 입장해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죽으면... 나, 울어버릴 거 에요." 그렇다.
80세의 나이를 잊고 우리에게 꿈과 희망과 행복을 주는 그가 내 곁을 떠난다면 나는 통곡하고 말 것이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의견도 나누고 댓글도 찾아 읽었다. 이야기가 많았다. 유독 동일한 질문이 있었다.
왜 가장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랜 토리노'를 만들었을까? 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다시 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간단히 그 대답을 알아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보수도, 진보도, 총잡이도 아니었다. 그는 '위대한 영화작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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