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니 쿤츠 지음ㆍ김승욱 옮김/작가정신 발행ㆍ664쪽ㆍ2만5,000원
21세기의 성 풍속도는 갖가지 풍경을 연출한다. 해이와 방종의 축 같은 미국은 젊은이들에게는 '순결 서약'이 종용되는 한편, 일본은 러브호텔에서라도 가임 여성들의 '관계'가 늘면 인구감소 상황에 제동을 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갖는다.
일본은 양성 평등이 실현되지 못해 결혼과 양육이 기피되고 있다 하고, 캐나다에서는 양성 평등이 잘 이뤄지면 출산률이 저하돼 결국 문화가 붕괴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같은 들쑥날쑥한 풍경의 핵심에 있는 것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결혼'이라는 낡은 관행이다.
결혼은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을까? 21세기 들어 급격히 해체되고 있는 가족 시스템처럼 결혼이라는 불안정한 제도 역시 붕괴돼 가고 있을까? <진화하는 결혼> 은 고대 그리스ㆍ로마에서부터 현재까지 시공을 넘나드는 풍부한 자료를 동원, 문화인류학적 접근으로 그 의문을 풀어간다. 진화하는>
"5,000년 만에 처음으로 결혼이 정치적ㆍ경제적 동맹 속의 연결고리라기보다는 두 개인의 사적인 관계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254쪽)
결혼이란 관행을 기준으로 21세기의 모습을 요약한다면 이 같은 진술이 성립된다.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결혼이 순수하게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정상화'된 것은 겨우 1700년대 말엽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의 결혼 풍경은 판이했다. 결혼은 기본적으로 엘리트들이 친척 아닌 사람들이나 사생아로 태어난 가족들을 제외시킨 채 자원을 축적할 수 있는 정치적ㆍ경제적 거래였다. 결혼을 감정적 욕구와 성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개인적인 관계로 보게 된 것은 불과 지난 200여년 동안이다.
경제적인 거래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유용한 사돈을 몇 명이나 확보할 수 있는지, 자식을 몇 명이나 낳았는지 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가 아니게 된 것은 그 200여년 동안의 일이라는 말이다. 이제 결혼의 성패는 가족 구성원들이 일, 정치, 공동체에 대한 의무로부터 벗어난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는가, 즉 구성원들의 정서적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켜 주는가 하는 기준에서 판가름난다.
이 책은 30여년 동안 가족제도에 대해 직접 연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한다. 논의를 풍성하게 하는 것은 지난 400년 동안 여성들이 쓴 일기 등 각종 사료를 동원, 결혼이란 시스템에 초점을 맞춰 과거의 가족 시스템을 해부하는 저자의 섬세한 시각이다. 즉 과거에 대한 저자의 풍부한 지식 덕이다.
저자에 따르면 최근 갑자기 범람하는 듯한 별의 별 희한한 부부관계나 성적인 관행들은 아무리 충격적으로 보일지라도 과거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시도했던 것들이다. 사망률이 높아서 재혼이 빈번했던 과거에는 지금보다 재혼 가정도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다는 실증적 지식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렇게까지 앞서 나갈 수 없다. 그런 것은 서기 2000년의 일이다." 동성 결혼을 두고 1970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했던 말이다. 피임술의 발달, 혼전 성교의 일반화, 이혼율의 폭증, 결혼 연령의 상승 등 전통적 결혼 관행을 송두리째 뒤흔든 태풍이 불어닥치면서 1960년대 이후의 미국은 시대의 강을 건너뛴 것이다. 보수적인 닉슨 대통령이 단호하게 했던 말은 돌아보면 결과적으로 대단한 예언이었던 셈이다.
이 책은 결혼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서구의 문화사를 총정리한 저작이라 할 만하다. 시대와 장르를 초월하는 풍성한 전거들, 방대한 자료들로 결론을 유추하는 이 책의 접근법은 2005년 워싱턴포스트가 왜 "올해 최고의 책"이라는 깃발을 달아주었는지 짐작케 한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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