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억대 바둑판 소송'으로 지난 1년여 동안 바둑계에 뜨거운 화제가 됐던 원로 프로 기사 윤기현 9단이 끝내 프로 기사직을 사퇴했다. 한국기원은 27일 "윤기현 9단이 25일자로 기사직 사퇴서를 제출, 즉각 수리됐다."고 밝혔다.
윤9단은 지난 1년여에 걸쳐 진행된 고 김영성 한국기원 이사 유족과의 '명품 바둑판'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에서 패소한 후 한국기원으로부터 '프로 기사의 품위를 훼손하고 기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사퇴하라는 종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억대 바둑판 소송'이란 2004년에 작고한 김영성 이사가 생전에 윤9단에게 건넨 '명품 바둑판' 2개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유족들과 윤9단 간에 벌어진 민사 소송이다.
김이사 사망 후인 2005년에 이중 한 개가 일본인에게 1,000만 엔에 팔렸는데 유족들은 "당시 김 이사가 팔아 달라고 맡긴 것이므로 판매 대금을 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윤9단은 "바둑판 둘 중 하나는 김 이사가 내게 준 것"이라며 "내 것을 팔았으므로 돈을 줄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유족 측은 2007년 부산지법에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1심 재판부는 '김씨가 윤9단에게 바둑판을 증여한 게 아니라 팔아 달라고 위임한 게 인정된다.'며 유족 측의 손을 들어 주었다.
윤9단은 당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던 김씨가 "바둑판 한 개는 자네에게 주겠다"고 분명히 말했다고 주장하지만 직접 현장을 목격한 증인도 없고 증빙 자료도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판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윤9단은 "억울하다. 사실과 다르다"며 즉각 항소했고 2심에서 양측이 서로 자기 측에 유리한 증인을 내세우며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였지만 윤9단이 또 졌고 다시 3심에서도 윤9단의 상고가 기각됐다.
한데 문제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진실 규명 여부와 관계 없이 바둑계 주변의 여론이 윤9단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 특히 인터넷 바둑 사이트에서는 익명의 네티즌들이 윤9단을 마치 명품 바둑판을 사취하려다 들킨 파렴치범 쯤으로 몰아붙였고, 한국기원에도 중징계를 요구하는 비난의 소리가 빗발쳤다.
여론의 압력에 못 이긴 한국기원은 대법원에서도 윤9단이 패소하자 기사 대의원회와 기사 임원회의 등을 잇달아 열어 윤9단 거취 문제를 논의했는데 여기서도 '자진 사퇴를 권고하되 만일 응하지 않을 경우 이사회에 제명을 건의해야 한다'는 강경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같은 분위기를 한상렬 한국기원 사무총장이 윤9단에게 전달했고 결국 윤9단이 지난 25일 기사직 사퇴서를 제출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윤9단은 "너무 억울하다"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고 있다. 과연 재판부가 미처 밝혀내지 못한 실체적 진실이 아직 남아있는 것일까.
경위야 어떻든 조남철 김인과 함께 초창기 한국 바둑계를 이끌었던 원로 프로기사가 뜻밖의 송사에 휘말리는 바람에 지난 50여년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지켜온 바둑동네를 쓸쓸히 떠나는 모습을 보려니 안쓰럽기 짝이 없다.
●윤기현 9단은/ 1970년대 국수 2연패… TV해설로 인기
윤기현 '국수'(67)는 1959년 입단, 1963년과 64년 신예기전인 제1~2기 청소년배에서 우승하면서 일찌감치 대성할 재목으로 주목받았다. 입단 이후 최고위전 패왕전 국수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각종 기전에서 활약하다 1968년 도일, 가노 요시노리와 기타니 미노루 문하에서 2년간 수학했다.
1970년에 귀국, 이듬해 국수전에서 당시 제1인자 김인을 꺾고 국내 바둑계 정상에 올라 2년 연속 타이틀을 지켰다. 1987년 9단으로 승단했다.
제9~10대, 12~15대 기사회장과 한국기원 이사를 역임, 기원행정과 국제바둑교류에 크게 기여했으며 흥창배와 보해배세계여자대회 및 여류프로국수전 전자랜드배 등 국내외 기전 창설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일찍부터 바둑보급에도 힘써 1981년부터 현재까지 한국경제신문 관전기를 집필했고 구수한 TV바둑해설로 팬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박영철 객원 기자 indra036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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