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제대하고 나는 한동안 속초 대포항에 머물러 있었다. 형님이 운영하는 횟집의 수족관 옆 한켠을 빌려 오징어 장사를 했는데 기실 무슨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볼 요량보다는 단지 온종일 바다를 보고 싶었다. 여하튼 나는 그 옹색한 공간 속에서 성능이 변변치 않은 석유난로 하나를 끼고 앉아 틈틈이 마르셀 푸르스트의 7부작 <잃어버린 시간을 ?아서> 을 읽고 있었다. 잃어버린>
그 무렵 나에게는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공짜로 애인 하나가 생겼다. 당사자는 다름아닌 정신이 조금 나간 여자였다. 이십대 후반의 여자였는데 나는 내 맘대로 책의 소제목을 빌려 그녀를 '꽃 핀 소녀'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다.
그녀는 시적시적 젖은 판장 안을 기웃거리며 생선 등속을 손질하는 아낙들을 간섭하거나 훼방을 놓곤 했다. 그러면 아낙들은 때리는 시늉으로 손사래질을 하고 그녀는 도망치면서 그 자리에 천진난만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 한 보따리를 쏟아놓곤 했다. 이히히히히히히… 꼭 이런 웃음이었다. 그녀는 가끔 어판장 시멘트 기둥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마치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앞에 있는 문수보살상 같았다.
그 문수보살 같은 그녀가 나를 찍은 것이었다. 그 후 그녀의 일과는 한꺼번에 바뀌어 버렸다. 그녀는 문수보살도 버리고 판장을 기웃거리는 훼방꾼 일도 모두 그만두었다. 그리고 오로지 내 주변을 온종일 빙빙 도는 것이 그녀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나중에 그녀의 구애는 조금씩 노골적으로 변했다. 언젠가는 읽던 내 책을 빼앗아 도망쳤다가 며칠이 지난 후 다시 내 앞에 놓고는 사라지곤 했다. 그 책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2부 '꽃 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이다. 어쩜 그녀는 그 다음 구애로 내 볼에 입맞춤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이렇게 그녀와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나는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다. 복학을 앞두고 공부를 조금 해두어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와 작별인사도 못하고 그렇게 훌쩍 새처럼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악수라도 한 번 하고 올 걸. 그냥 빈말이지만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한 번 해줄 걸. 고속버스를 타고 오면서 나는 느닷없이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가 다시 어판장 시멘트 기둥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앞에 있는 문수보살상이 되어버렸을 모습을 생각하자 몸이 너무나 무거웠다.
고영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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