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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꽃 핀 소녀'의 책 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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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꽃 핀 소녀'의 책 감추기

입력
2009.03.29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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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제대하고 나는 한동안 속초 대포항에 머물러 있었다. 형님이 운영하는 횟집의 수족관 옆 한켠을 빌려 오징어 장사를 했는데 기실 무슨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볼 요량보다는 단지 온종일 바다를 보고 싶었다. 여하튼 나는 그 옹색한 공간 속에서 성능이 변변치 않은 석유난로 하나를 끼고 앉아 틈틈이 마르셀 푸르스트의 7부작 <잃어버린 시간을 ?아서> 을 읽고 있었다.

그 무렵 나에게는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공짜로 애인 하나가 생겼다. 당사자는 다름아닌 정신이 조금 나간 여자였다. 이십대 후반의 여자였는데 나는 내 맘대로 책의 소제목을 빌려 그녀를 '꽃 핀 소녀'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다.

그녀는 시적시적 젖은 판장 안을 기웃거리며 생선 등속을 손질하는 아낙들을 간섭하거나 훼방을 놓곤 했다. 그러면 아낙들은 때리는 시늉으로 손사래질을 하고 그녀는 도망치면서 그 자리에 천진난만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 한 보따리를 쏟아놓곤 했다. 이히히히히히히… 꼭 이런 웃음이었다. 그녀는 가끔 어판장 시멘트 기둥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마치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앞에 있는 문수보살상 같았다.

그 문수보살 같은 그녀가 나를 찍은 것이었다. 그 후 그녀의 일과는 한꺼번에 바뀌어 버렸다. 그녀는 문수보살도 버리고 판장을 기웃거리는 훼방꾼 일도 모두 그만두었다. 그리고 오로지 내 주변을 온종일 빙빙 도는 것이 그녀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나중에 그녀의 구애는 조금씩 노골적으로 변했다. 언젠가는 읽던 내 책을 빼앗아 도망쳤다가 며칠이 지난 후 다시 내 앞에 놓고는 사라지곤 했다. 그 책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2부 '꽃 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이다. 어쩜 그녀는 그 다음 구애로 내 볼에 입맞춤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그녀와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나는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다. 복학을 앞두고 공부를 조금 해두어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와 작별인사도 못하고 그렇게 훌쩍 새처럼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악수라도 한 번 하고 올 걸. 그냥 빈말이지만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한 번 해줄 걸. 고속버스를 타고 오면서 나는 느닷없이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가 다시 어판장 시멘트 기둥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앞에 있는 문수보살상이 되어버렸을 모습을 생각하자 몸이 너무나 무거웠다.

고영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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