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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최영미 네번째 시집 '도착하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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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최영미 네번째 시집 '도착하지 않는 삶'

입력
2009.03.29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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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늘 떠나는 사람이었어요. 돈, 권력 같은 것들을 좀 우습게 알았지요. 하지만 부모님은 늙어가시고, 2년마다 집을 옮겨다녀야 하고…. 현실적인 욕구와 맞닥뜨리니 좀 미안해졌지요. 그런저런 느낌 때문에 한동안 글을 못 쓰기도 했지만, 결국 시가 저를 구원해 주더군요."

최영미(48)씨가 4년 만에 자신의 네번째 시집 <도착하지 않는 삶> (문학동네 발행)을 냈다. 새 시집에는 불덩이 같았던 1980년대에 청춘을 저당잡혔던 한 여성이, 시나브로 닥친 중년이라는 시간대를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당혹감과 공허감이 짙게 묻어난다. 그러나 최씨의 그것은 80년대에 대한 부채감과 쓰라린 환멸감을 그 후 20년 동안 취직_내집 마련_주식투자_극성스런 자녀교육 따위에 몰두하며 허위허위 외면하려 했던 동년배들이 느끼는 감정과는 조금 다르다.

남편도, 아이도, 집도 없이 전업 시인으로 살아오며 쉰 살의 문턱에 다다른 시인은 "이제 내 손에 쥐어진 패는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되묻는다. 고통스러운 그의 자기응시는 '기계가 멈추었다// 가고 싶은 길은 막혔고/ 하고 싶은 일은 잊었고// 배터리는 나갔는데/ 갈아끼울 기력도 없다'('청개구리의 후회'에서)는 무력감을 낳기도 하고, '내 아무리 잘난 척해도/ 그들처럼 불쌍한 인간./ 고프면 먹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 ('하늘의 소리'에서) 자기연민에 빠지게도 한다. 그리고 '물질에 초연하지 못하고/ 권력에 엎드릴 수도 없는'('漢詩를 읽은 다음날'에서) 심리상태로 몰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삶에 대한 긍정은 불각의 순간에 찾아든다. 그가 "내가 시를 쓰지 않고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로 번민하던 어느 비 내리는 여름날, 담배를 피우기 위해 베란다로 나왔더니 불현듯 한 구절이 스며들었다. '내게 들어왔던, 내가 버렸던 삶의 여러 패들은// 멀리서 보니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지루하지 않은 풍경'에서). '이루지 못할 소원은 붙잡지도 않아'('사계절의 꿈'에서)라고 선언하는 시인은 이제 생활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을 통해 삶을 긍정하기로 한다. 조카의 손을 붙들고 극장을 찾은 그는 '통장의 잔고도 잊고/ 심장에 박힌 가시도 잊고/ 용서하지 못하던 밤들도 용서'('극장'에서)한다고 고백한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로 상징되는 에너지 넘치고 뾰족뾰족한 '최영미' 스타일의 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젊은날의 열정을 곰삭이고 자신의 상처를 덧내고 헤집은 뒤 인생에 대한 깊어진 성찰로 승화시킨 몇몇 시편은 그의 이번 시집의 순금과 같다.

최씨는 몇년간 정치집회는 애써 피하려 했지만 지난해 여름에는 촛불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춘천에서 기차를 타고 부랴부랴 상경했었다고 한다. 그것은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종이컵 안에서 안전하게 촛불처럼 온화한 눈빛./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 외치다가 내가 죽을 구호를 모르는 건강한 입술./…/ 친구와 수다를 즐기며 이탈리아 식당에서/ 칼을 들고 연어의 생살을 갈랐다. / 입 안에 죄의식의 거품을 품지 않고'('2008년 6월, 서울'에서)

"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써놓고 나니 좋더라. 80년대에는 시위에 나갔다 오면 밥 먹는 것도 죄스러웠다. 지난해 촛불집회가 끝나고는 요즘 젊은이들처럼 이탈리아 음식을 시켜 먹었다. 시위는 시위고 좋은 음식은 좋은 음식 아닌가. 이게 역사의 진보 아닌가 싶다"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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