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뤼순(旅順)감옥장 등이 사형장 검시실에 앉아 안중근을 불러들여 사형집행의 뜻을 밝히고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다. 안중근은 "별로 없으나 나의 이번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와 평화를 도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 각의도 내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해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중근은 '동양평화' 삼창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한 후 태연하게 형 집행을 받았다(소노키 스에요시 통역의 기록). 그 날은 온종일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정확히 5개월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15분.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군악대의 환영곡과 일장기를 든 일본인들의 만세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토는 러시아 제정대신 코코프체프의 안내로 귀빈들의 영접을 받으며 러시아군 수비대를 사열하기 위해 의장대 정면을 우측에서 좌측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안중근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가 10보 남짓한 거리에서 이토의 오른쪽 가슴에 브로닝 권총 세 발을 명중시켰다(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안중근 평전> 에서). 안중근>
▦안중근과 이토는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무사집안 출신이다. 그러면서도 학문 연마에 열중해 식견과 시야를 세계로 넓혔다. 소년시절 안중근은 집안 서당에서 초빙한 스승에게서 유교경전은 물론 조선의 역사와 세계사를 배웠으며, 어머니(조마리아)의 영향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됐다. 이토 역시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인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가손학원에서 수학했으며 해군학을 배우려 영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문명 개화론자이면서도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이 함께 동양의 평화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이 이토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동양평화론'에 대한 엄청난 시각차 때문이었다. 옥중 집필로 끝을 맺지 못한,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로 시작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은 이토가 말하는 서구의 방식을 흉내낸 국권침탈을 통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아니었다. 지금의 유럽연합 같은 공조와 협력, 연대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으로 평화회의 조직, 공동 은행 설립과 공동화폐 발행까지 구상했다. 그런 그에게 이토는 평화의 약탈자였다. 그의 저격은 테러가 아닌, 지금도 살아있는 '평화의 메시지'였다. 동양평화론>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