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리스트'를 매개로 한 사정(司正)의 삭풍이 정치권 전반에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이 칼 바람이 언제까지 불지, 파괴력이 얼마가 될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이번 사정 역시 역대 정권들의 집권 초반 사정 패턴과 닮았다는 점에서 이후 전개 과정을 어렴풋이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역대 정권 초반에는 집권 세력이 의도했든 아니든 어김없이 정치권 사정이 진행됐다. 왜 초기인가. 문민정부 당시 사정 업무에 관여했던 인사는 "대통령이 되면 모든 정보를 쥐게 된다. 정치가 썩었다는 게 새삼 눈에 들어오게 된다. 깨끗하게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 댄다."고 말했다.
한 여권 인사는 또 다른 이유를 댔다."부패를 척결한다는 데 박수 치지 않을 국민은 없다. 게다가 권력자 입장에선 모든 정보를 쥐고 시기와 강도를 조정할 수 있다." 정국의 이니셔티브를 쥐게 되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 청와대 출신 인사는 "집권 1,2년 차에 사정은 정권의 영(令)을 세우는 효자 노릇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 등 사정 당국은 "플랜을 갖고 사정 작업을 하는 게 아니다. 집권 초반에 제보들이 들어와 수사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의도를 가진 사정이 아님을 강조한다.
집권자는 대개 피아를 가리지 않는 '성역 없는' 사정을 선언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사와 국민'의 이름으로 이를 다짐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법대로 사정'을 선언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언명과 상관 없이 정권 초반 사정의 칼날은 어김없이 전(前) 정권 혹은 정적들의 목을 향했다. 한 정치권 인사의 얘기다. "사실 검찰이 현정권 사람들을 겨냥하려고 해도 축적된 자료가 없다.
반면 전 정권 인사들의 자료는 가득하다." 또 다른 관계자의 얘기다. "돈은 주고 받은 사람만 아는데 대체로 준 사람이 먼저 입을 열면서 수사가 시작된다. 돈 준 사람 입장에선 힘 빠진 과거 실세 얘기를 털어놓기는 어렵지 않다." 정권 초기 사정이 '복수전'의 모양새를 띄게 되는 이유들이다.
결국 집권 초기 사정은 상징적 타깃을 날리며 마무리 된다. 그 상징적 타깃은 정권 운영의 걸림돌인 경우가 많았다. 문민정부는 6공세력의 핵심인 박철언씨의 발목을 잡았고, DJ정권은 세풍 안풍 사건 등으로 YS민주계를 길 들였다. 노무현 정권은 대선자금 사건으로 한나라당과 이회창 전 총재를 코너로 몰아넣었다.
역대 정권들의 사정 패턴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공통점은 집권 초기 전 정권을 향했던 검찰의 칼이 집권 중후반기를 지나면 현 정권쪽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명분과 힘을 실어준 검찰의 칼에 나중엔 거꾸로 당하는 셈이다. YS말기 김현철, DJ말기 세 아들이 구속된 것은 대표적 사례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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