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라고 하면 대개 생물의 진화를 생각하지만 돌연변이, 유전, 자연선택과 같은 진화론의 핵심 개념은 경제주체에도 적용된다. 진화론이란 사물이 내부 구성요소들끼리, 그리고 외부와 상호작용해 비가역적으로 변해간다고 보는 것으로, 사물을 반복 운동하는 기계로 보는 기계론적 관점과 대립된다.
이러한 진화론적 세계관은 고대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아이작 뉴턴에 의해 고전역학이 확립된 이후 여러 학문 영역에서는 기계론이 지배적 관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담 스미스, 칼 마르크스 등 고전파 경제학자의 저작 속에 진화론적 요소가 발견되며,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이 다윈의 진화론 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진화론적 접근은 생물학 이전에 경제학에서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셈이다. 근대 경제학의 체계를 정립한 앨프레드 마셜도 "경제학의 메카는 고전역학이 아니라 생물학"이라고 한 바 있다.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것은 곧 진화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며,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엔진은 바로 돌연변이에 해당하는 혁신"이라고 했다.
최근 진화경제학의 부흥을 불러일으킨 책은 리처드 넬슨과 시드니 윈터의 1982년 저작인 <진화적 경제변화론> 이다. 기업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해서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보는 신고전파와 달리, 이 책의 저자들은 적응적 행동을 한다는 가정에서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여준다. 넬슨과 윈터에 따르면 기업들은 목적이 같아도 각각 다른 관행을 따른다. 진화적>
어떤 상황에서 특별한 계산 없이 으레 취하는 행동규칙이 곧 관행이다. 기업들은 주변상황이나 자기 행동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안고 있기에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찾기보다는 문제가 없는 한 과거의 행동을 따른다.
이윤에 영향이 없다고 믿거나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를 때 기업은 관행에 의존해 행동하지만, 이윤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는 '감'이 오면 목적의식인 행동을 취해서 결국 국지적으로 최적화를 달성한다. 전역적으로 이윤 극대화를 달성하지는 못해도 국지적으로는 높은 이윤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 합리성 아닌 관행 따르는 기업들
진화경제학은 신고전파와 다음의 면에서 다르다. 첫째 균형상태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불균형상태에서 동태적 변화과정을 분석 대상으로 한다. 둘째 제한적으로만 합리적인 경제주체를 상정한다.
경제주체들은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기껏해야 국지적 최적화에 그친다. 셋째 이질성을 전제로 한다. 대표기업만이 아니라 다양한 기업들이 존재해 서로 경쟁하고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주류경제학은 가장 효율적인 주체가 살아남고 경제 전체도 가장 효율적인 상태에서 균형을 유지한다고 본다. 그런데 현실을 보자. 효율적이지 못한 주체들도 가득하며 오히려 더 왕성하게 번식하는 일이 빈번하다.
또 어떤 사회의 현 상태(균형)가 최적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그렇더라도 사회개혁은 쉽지 않아 사회는 종종 비효율성의 함정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들은 주류경제학에서 보면 이론과 동떨어진 예외적 현상으로 치부될 테지만 진화론적 접근을 취하면 설명이 가능하다.
가령 좌측통행과 우측통행이라는 두 제도 중 어느 쪽으로 귀착될 것인가는 경제적 합리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건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좌측통행을 택하면 우측통행하는 사람들은 점점 마주오던 사람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아져 결국 좌측통행을 택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좌측통행이라는 균형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목한 '자생적 질서'의 탄생이다.
처음 어떤 이유에서든 특정 전략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쪽으로 균형이 성립하며, 한번 정해지면 다른 균형으로 가기 어렵다는 것이 '경로 의존성'이다.
'전략적 보완성'이란 특정 전략을 채택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기도 같은 전략을 채택하는 것이 유리한 상황을 의미한다. 전략적 보완성 개념을 빌리면 우리는 극대화기준을 이용하지 않고도 좌ㆍ우측통행 중 하나가 선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논리를 확장하면 두 가지 다른 균형상태가 있을 때 사회전체의 이익은 똑같더라도 그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 등 사회정치적 요인이나 권력관계에 의해 하나가 선택될 수 있다.
스티븐 매글린 등은 중앙집권적 통제체제를 갖춘 공장이 출현하면서 노동자(장인)들이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긴 과정에 대해 이것이 기술적으로 효율적이어서라기보다 자본가에게 더 많은 과실을 주기 때문에 선택됐다고 주장했다.
■ 공진화의 부조화가 위기를 낳는다
이처럼 진화경제학에서 보면 균형상태는 효율적 상태일 수도 있고 비효율적 상태일 수도 있다. 경제위기를 초래하는 비효율적 균형이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전략적 보완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 사이의 보완성 때문이기도 하다.
제도들 사이에 서로의 존재가 유리한 상황이 존재하면 문제가 되는 특정제도만 따로 떼어내 개혁하기가 어렵다. 개별 주체와 주변환경, 기술경제 패러다임과 사회제도 등은 서로 공진화(co-evolution)하는데 이 양자 사이에 부조화가 위기 발생의 원인이 된다.
최근의 위기는 금융계의 경제주체들이 빠른 혁신을 통해 진화했음에도, 이들에 대한 규제환경이 못 따라가서 발생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부조화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기에 위기도 재발한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비효율적 균형을 인지하고 제도 변화를 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엔 정부에 의한 강제(인위적 개혁), 실험, 외부와의 접촉(합병, 피지배) 등 여러 가지 방식이 가능하다. 그러나 진화론은 경제나 조직을 의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을 경계한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투입요소를 변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시스템이 내적 진화과정을 통해 스스로 찾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진화론적 사고이다. 경제 내에서 탐색과 학습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근ㆍ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진화경제학 관점서 본 경제위기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부실이 세계 경제의 침몰로 확대되자 충격과 자성에 빠진 것은 책임의 주체인 금융사와 보증기관, 정부 규제기관뿐만이 아니었다. 경제학자들도 이 위기를 어떻게 진단하고 예측해야 하는가를 놓고 숙고했다. 이번 경제위기는 경제학의 위기이기도 했다.
김창욱 삼성경제연구소 복잡계센터장은 "전통적 시각에서 이 같은 위기는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불균형상태지만, 진화경제학적으로는 경제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늘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진화론의 핵심인, 개체의 변이와 자연선택 메커니즘이라는 개념을 빌리면 오늘날의 금융ㆍ경제위기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용하다는 것이다. 진화론은 그렇게 생물학 이론에서 나아가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일반에 적용되는 이론이 되고 있다.
뉴턴역학에 기반한 전통 경제학적 시각에서 경제적 변화는 균형점을 찾아 수렴하는 것이어서 외부에서 충격이 오더라도 곧 안정상태로 회귀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렇게 보면 금융위기의 단초였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부실은 일부 금융사의 손실 처리나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해결될 일이다. 실제로 위기 초기에는 이러한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진화경제학으로 보면 경제 주체는 다양성(개체간 변이)을 가지며, 작은 변화가 연쇄반응을 통해 누적되고 증폭되고 급격히 변화하는 선별 메커니즘을 따른다.
김 소장은 "변화가 쌓이고 쌓여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 현상을 미국의 경제학자 토스타인 베블렌(1857~1929)은 '누적적 인과'라고 이름붙였다"며 "전통 경제학에는 없는 이 개념을 통해 보면 현재의 금융위기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부실은 애초에 작은 충격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치 생물체의 작은 돌연변이가 생존경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할 때 형질 변화가 급속히 퍼지고 종 분화를 낳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 시스템이 요동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작은 변이는 증폭되고 누적됐다.
이번 경제위기에서 불안정한 상황이란 금융 분야 특히 파생상품의 과도한 팽창이라고 볼 수 있다. 파생상품 시장 규모는 불과 5~6년만에 2,000억달러에서 62조달러로 수십 배가 커졌다.
김 소장은 "파생상품이 이렇게 커지면서 수많은 경제주체들이 긴밀하게 연결됐고, 작은 부실이 불안정한 파생상품 시장에서 연쇄반응을 일으켜 크게 증폭됐다"고 설명한다.
생물체의 진화가 환경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진화경제학은 변화의 결과로 또 새로운 변화가 태동한다고 보기 때문에 경제위기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김 소장은 "물론 진화경제학이 위기를 미리 예측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경제위기가 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가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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