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전 7시30분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 반백의 중년 남성 11명이 모였다. 지난해 출범한 부산고 발전위원회 실무위원들이다. 이들은 "한강 이남 최고의 명문"이라 자부했던 모교의 부흥을 위해 2011년까지 100억원의 모교발전기금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내달 한경대 총장으로 취임하는 김성진(60ㆍ21회)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먼저 운을 뗐다. "내가 장관 되고 총장도 된 것은 모교의 힘이 컸다"며 매달 100만원씩 임기 동안 5,000만원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김용민(57ㆍ23회) 전 감사원 감사위원은 "6월 22일 개교기념일에 일일교사로 참여해 후배들에게 명문고의 자긍심부터 심어주자"고 화답했다.
같은 날 저녁 강남의 한 식당에서는 부산고 26회(1973년 졸업) 동문 9명이 기수 발전위 첫 모임을 열었다. 류흥목 한국공장기계 사장이 "친구들아, 내가 1억 낼란다"고 분위기를 띄우자, 호응이 이어져 금세 2억6,000만원이 약정됐다.
이들은 목청 높여 부르던 교가처럼, '바다처럼 浩浩(호호)한 사나이의 큰 뜻'을 후배들도 품기를 바라며 다음 달 동기회를 기약했다.
특목고 돌풍 등에 밀려 휘청거리는 전통 명문 공립고의 부활을 위해 동문들이 뭉치고 있다. 1974년 고교평준화 이후 위상이 흔들린 이들 학교는 1990년대 대폭 신설된 특목고, 자립형 사립고에 직격탄을 맞았다. 더욱이 2010학년도 도입될 '선 지원, 후 추첨' 학교 선택제를 앞두고 불안감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동문들이 대책 마련에 팔을 걷고 나선 것이다.
모교 발전기금 모금이 이미 100억원을 돌파한 곳도 있다. 서울고 총동창회에 따르면 25일 현재 약정액은 110억 2,300여만원(입금액 97억800여만원)에 달한다. 1,958명의 동문들이 힘을 보탰다. 경남고도 2010년까지 100억원의 발전기금을 모을 계획이다.
옛 명문고 동문들이 모교의 위기를 절감하는 대목은 아무래도 서울대 합격자 수의 급감. 2009학년도 서울대 합격자 5명 중 1명(23.9%)은 특목고나 자사고 출신이며, 합격자 수 상위 10개교에 일반고는 전무하다.
서울고와 경기고가 각각 14명으로 체면치레를 했지만, 공립 명문의 간판이었던 경기고도 1969년 314명이던 서울대 합격자가 2009년 14명으로 40년 새 5%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방 명문고의 사정은 더 안쓰럽다. 한때 서울대 100명은 기본이던 부산고와 경북고는 지난 10년간 각각 12명에서 1명, 17명에서 1명으로 줄었다. 전통의 지방 명문 공립고 중 올해 서울대 합격자 수가 5명을 넘긴 곳은 대전고(6명)뿐이다.
그러나 옛 명문고 동문들의 모교 지원이 서울대 합격자 수 배가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은 아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위기의 공교육 살리기.
한마디로 교육환경 개선을 통해 '찾아오는 학교'를 만들어 사교육 열풍에 짓눌려 빈사 상태인 공교육을 되살리는 모델이 되자는 것이다. 특히 지방 공립고의 부활은 지역 공교육 거점 마련을 통해 교육의 수도권 쏠림도 완화할 수 있는 지적이다.
동문들은 이를 위해 ▲교내 인프라 확충 ▲장학제도 확대 ▲교사 인센티브 제공에 힘을 쏟고 있다.
부산고 발전위는 2011년 목표로 모금 중인 100억원의 기금으로 원거리 우수학생 유치를 위한 기숙사 건립과 성적 우수학생들의 미국 아이비리그 견학, 우수 교사들의 해외연수, 외부 전문 강사 초빙 등을 지원할 계획이다.
대전고 동문들은 지난해 1대1 결연을 통해 재학생 110명에게 1인당 170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광주제일고 동문들도 지난해 우수학생 유치의 기반이 되는 기숙사 리모델링 비용으로 2억원을 지원했다. 용산고 동창회도 학교 건물 현대화를 위해 Y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금전적인 후원만이 아니다. 서울고의 경우 동문 선배들이 재학생 50명을 1대1로 후원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을 4년째 시행하고 있다. 또 스승ㆍ선배 책 모으기 운동을 통해 후배들의 '책곳간'도 채우기로 했다.
한일섭 광주서중일고 총동창회 홍보이사는 "입시경쟁을 통한 모교의 명성 찾기에만 머물지 않고 공교육 침체기에 실력은 물론 인성교육도 아우르는 진정한 명문고의 부활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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