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김희정(39)은 사진을 찍는 동안 연신 "어색하다"고 했다. "예쁜 척하는 게 너무 익숙하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앞 모습보다 나은 옆 모습을 찍어달라"고 했고, "풀어 헤친 머리보다 묶은 머리가 더 괜찮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거리낌 없는 화통한 목소리는 스튜디오를 금세 활기로 채웠다.
방송 촬영을 막 마치고 도착해서 일까. 김희정은 MBC 시트콤 '태희혜교지현이'의 시샘 많고 호기심 가득한 수다쟁이 전업주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맡은 역할 때문인지 요즘 좀 수다스러운 면이 있어요.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자태가 달라지는 것처럼 역할에 따라 행동도 바뀌는 듯해요."
2년 전만해도 김희정은 뭇 시청자들에게 낯선 이름이었다. TV시청이 주된 놀거리인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기야 특정 배역 이름이 주어지기보다 사무실 직원 역 등으로 카메라 앞에 10여년을 줄곧 서온 탤런트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채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드라마는 반전에 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지난해 10월 종영한 SBS 주말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의 모지란 역으로 그의 연기 인생은 신세계를 맞았다.
유부남과 눈이 맞아 가정까지 팽개치며 사랑을 선택하고, 사랑의 배신에 눈물짓는 푼수기 어린 그녀의 '모지란' 연기는 시청자들의 갈채를 끌어냈다. 그리고 그는 지난해 연말 SBS연기대상 연속극부문 여자 조연상을 손에 쥐면서 여의도에서의 달라진 위상을 확인했다.
중앙대 연극학과 3학년 재학 중이던 1991년 SBS 공채 탤런트 1기로 방송에 입문했지만 시트콤 출연은 '태희혜교지현이'가 처음이다. 데뷔 20년을 바라보는 이 대기만성형의 연기자는 "계속 떠들어야 하는 역할이니 순발력도 상당히 필요하고, 경쾌한 템포를 오버하지 않으면서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은 뒤 천연덕스럽게 엄지와 검지를 쪽쪽 빠는 등의 섬세한 아줌마 연기는 그의 발언이 엄살임을 짐작케 한다. "어렸을 때도 대학생 역할을 못해 봤어요. 스물 다섯 살 때 이미 사십 대 아줌마를 연기했으니 지금 역할이 저에겐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어요."
뒤늦은 스포트라이트에 행복을 느끼는 그는 연기자의 길을 택했을 때부터 "톱(Top)이 되자는 꿈은 애초부터 꾸지 않았다"고 했다. "눈에 확 띌 만큼 외모가 출중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넌 나이 들면 좀 더 좋은 시절을 맞을 거야'라는 선배들의 말에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10년을 연기하며 보내도 하나도 나아진 게 없더라고요. 하지만 10년 동안 사라진 주변의 많은 연기자들을 보며 '연기는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는 게 가장 중요하구나'하고 깨달았어요. 저는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TV에선 단역을 전전했지만 대학시절 그의 지위는 주연이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학과 공연 때마다 주연을 맡았다"고 했다.
대학 3학년 시절엔 64㎏ 가량의 몸무게서 16㎏ 정도의 살을 빼 연극 '세자매'의 주연을 꿰차는 투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몸무게가 꽤 나갔어요. 그 몸으로 연극학과에 들어갔어요. 지금은 '용' 된 거죠(웃음)."
그는 오랜 무명시절에 대해 아쉬움은 없다고 했다. "맡은 역할에 몰입해 살다 보니 사람들이 단역이라고 무시하는 것조차 몰랐다"고 했다.
"단역이라도 꾸준히 일해서 돈에 허덕이지 않았으니 감사하며 살았죠. 저는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열심히 하면 누군가가 도와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예전엔 그 생각에 물음표가 붙었지만 요즘은 마침표가 찍혀 있는 상황입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