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일보에게 고마운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 가수 이베트 지로를 한국일보가 초청해서 공연할 때 내 노래 '노란 셔츠의 사나이'를 그녀가 부르고 취입한 일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나를 1960년대 초에 '미스 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촉한 일이랍니다." 작곡가 손석우씨의 말이다.
작곡가 정풍송과 함께 서울 강남의 한 칼국수 집에서 만난 손석우씨는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다. 청각이 예전 같지 않아서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약간 불편할 뿐, 다른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1920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아흔이 되었는데, "망백(구순) 잔치를 하셔야죠"라고 묻자 "나는 70이나 80때나 잔치 벌인 적 없어요. 그냥 가족들끼리 조용히 지냅니다"라고 답한다.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란 셔츠의 사나이(발매 당시에는 노오란 샤쓰라고 표기했음)'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큰 모멘텀(Momentum)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한류'의 기틀을 마련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노래로서 인정받고 있다.
1961년 한명숙이 이 노래를 부르자 그야말로 전국은 노란 셔츠의 열풍에 휩싸였다. 손석우씨 자신도 그렇게 큰 반응을 얻을 줄 몰랐다고 한다. 그 때 그는 비너스레코드사라는 이름을 내걸고 그 자신이 제작을 했다.
"셔츠(그는 늘 이렇게 표현한다)가 엄청나게 팔리자 돈이 많이 들어 왔는데 들어오면 무얼 하나요? 다른 노래 만드느라고 다 나가는데. 그 당시 영향력이 막강했던 홍택씨(그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이렇게 부른다)가 나를 많이 도와 줬으면 돈 좀 벌었을 텐데, 하하하."
'셔츠'에 대한 애정이 깊지만, 그는 자신의 초기 작품으로 1958년에 만든 '검은 장갑' 과 '이별의 종착역'을 유난히 사랑한다고 한다. 이 두 노래는 미남이고 기름진 목소리의 저음 가수인 '손시향'이 불렀다.
그는 손석우씨의 수제자이고 오직 손씨의 노래만 취입을 했다. 심지어 "손시향은 손석우씨 아들이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들은 부자지간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이 지냈지만, 60년대 초 손시향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이 노래들은 얼마 후에 블루벨즈라는 남성 4중창단이 다시 취입을 하기도 했다.
손씨는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했다. 학생시절에 그는 매우 고민을 했다. 상업학교를 나와서 은행원 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로 갈 것인가.
음악을 좋아하고, 그림을 잘 그리며, 글쓰기를 좋아하는 문학 청년이었으니 '과연 어느 길이 내 길인지' 가늠하기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상업학교 2학년 때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선구자인 김해송씨를 만나는데 이것이 손석우씨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만일 그 때 해송씨를 만나지 않고 유명한 화가를 만났으면 아마도 나는 지금 화가가 되어 있을 것이고, 시인이나 소설가를 만났으면 문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이다. 그러나 그는 미술과 문학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노래의 90퍼센트는 그가 스스로 작시를 한 것이고, 때로는 레코드 앨범 재킷의 그림을 직접 그리기도 했다.
작곡가인 그가 다른 사람의 곡에 가사만 만들어 준 경우가 더러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곡이 '청춘 고백'이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 이내 심사 믿는다 믿어라 변치말자"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기타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D 단조 연주를 할 때 단골로 치는 곡인데 불멸의 작곡가 박시춘씨가 손석우씨에게 의뢰해서 만든 것이다. 노래는 역시 당대 최고의 가수인 남인수씨가 불렀다.
손석우씨의 작풍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흐름의 기본은 역시 자존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중음악의 수준을 지키고 싶어하는 모습이 그의 작품에 담겨 있다는 얘기다.
최희준이 미 8군 무대에 나와 일반가수로 데뷔할 때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라는 노래를 부르게 했고, 스탠더드 가수이며 KBS 전속인 미모의 김성옥에게 '초혼'과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을 부르게 한 것 등이 그 맥락이다.
송민도의 '나 하나의 사랑', 배우 최무룡이 부른 '꿈은 사라지고',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 김상희의 '삼오야 밝은 달', 한명숙의 '우리 마을', 블루벨즈의 '즐거운 잔칫날' 등등이 그가 만든 주옥같은 노래들이다. 1950년대 KBS 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인기 연속극 '청실 홍실'의 주제가도 그가 작곡했다.
내가 손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약 47년전 쯤 된다. 그는 언제나 성품이 조용했고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주 저녁에 만난 그는 매우 속이 상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우선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지나치게 유행 일변도라는 것이 그를 속상하게 했다.
하나가 유행한다 싶으면 모든 노래가 그 방향으로 쏠리는 이른바 '쏠림 현상'은 견디기 힘든 비극이라는 얘기다. "자존심이고 뭐고 없어요. 돈만 벌리면 무슨 짓이든지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희망이 없어요. 젊은 사람들이 왜 그래요?" 그가 흥분하는 모습을 나는 정말로 처음 봤다.
"유행하는 리듬을 타고 싶으면 선율이라도 새롭게 해야지, 모두 비슷하게 만드는 것은 지치는 일이에요." 사실 이 문제는 그가 지적하지 않아도 최근 대중음악계의 대표적인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한글로는 같고 한자만 다른 '손석우(孫錫友)'가 본명이고 지금 쓰고 있는 필명은 가운데 '석(夕)'자만 다르다. 그는 자신이 만든 노래들을 모은 작품집을 책으로 발간했는데 그 중 맨 말미에 눈에 띄는 페이지가 있어 소개한다.
'회한'이라는 곡에 의견을 달았는데, "이 노래는 도쿄 체류시 거처에서 쓴 것이다. 아직 음성으론 발표되지 않고 있지만, 나로서는 애착이 있는 것으로 누군가에 의해 한번 불리어지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다"라고 했다.
발라드풍인 이 노래의 가사는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아마도 그것은'인생 90'을 되돌아보는 삶의 '회한'일지도 모를 일이다.
상명대 석좌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