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멕시코 마약 조직으로부터 총탄 3발을 맞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경찰 간부 살바도르 에르난데스는 최근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후 국경 수용소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을 빠져 나와 열악하고 답답한 수용소를 찾은 이유는 자신의 이름이 마약 카르텔 암살 리스트에 올라 있어 멕시코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근무했던 국경 도시 후아레스 소속 경찰관 50여명이 작년 한해에만 마약 카르텔에 피살됐고, 구체적으로 살인 명부를 적시하는 경고문이 나돌자 사직한 경찰도 적지 않다.
마약 범죄를 다룬 기사를 줄기차게 썼던 신문기자 에밀리오 구티에레스도 마약조직의 살해 협박을 받은 후 직장과 집을 모두 포기하고 열 다섯 살 아들과 함께 수용소를 찾았다. 구티에레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능한 한 오래 수용소에서 지낼 각오가 돼있다"며 "멕시코에 머물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구티에레스는 수용소에서 7개월을 버틴 끝에 다행히 안전한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지만, 에르난데스는 멕시코로 돌아가 은신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침체로 돈을 벌기 위해 국경을 넘는 멕시코 불법 이민자가 줄고 있는 반면 새로운 형태의 난민이 급증하고 있다. LA타임스와 더네이션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미국과 멕시코 국경 수용소에는 마약 전쟁이 시작된 수년 전부터 기업체 사장, 사법기관 관계자, 언론인 및 전문직 종사자 등 엘리트 출신 망명 신청자가 몰려들고 있다. 지난해만 200명이 신청해 전년의 2배에 달했고 올해 1, 2월에도 벌써 70명이 추가로 국경 수용소 문을 두드렸다. 치안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미 국경 쪽으로 이주한 신청 대기자도 수천 명에 달한다.
그러나 마약범죄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망명 신청을 미국 정부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희박하다. 난민 지위를 인정 받으려면 정치적, 사회적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지만 신청서에는 대부분 범죄 공포만 기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엘파소, 샌디에이고, 라레도 등 국경 수용소를 찾는 멕시코인은 줄지 않고 있다.
신청자들은 "추방돼도 비좁은 수용소에 잠시라도 머무는 것이 멕시코에 있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말한다고 LA타임스는 전했다. 조국을 등져야 할 정도로 치안이 불안하다는 뜻이다. 미국 정부는 신청자가 쇄도할 것을 우려해 망명 승인 기준을 낮출 계획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배리 매카프리 미국 육군 교수는 "멕시코 정부의 마약 전쟁이 실패한다면 수백만 명의 난민이 미국으로 몰려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강철원 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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