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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브레이크없는 입학사정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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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브레이크없는 입학사정관제

입력
2009.03.2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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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컬럼비아대 니콜라스 레이먼 교수는 자신의 저서 '빅 테스트(The Big Test)'에서 이렇게 적었다. "미국인들의 우수 대학 집착은 정도를 지나치고 있다. 입학허가를 둘러싼 광기는 파괴적이고 비민주적인 것으로, 수백만 인구의 의식을 혼동시키고 교육을 왜곡시키고 있다."

이 책은 해가 거듭될수록 과열되고 있는 미국 대학입시의 혼탁한 실상을 고발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입학사정관을 지낸 그의 '고해성사' 이기도 하다. 교육적 목적과 입학허가 간의 괴리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면서도 점점 무기력해지는 입학사정관의 고민이 녹아 있다. 내신 성적과 SAT 성적 외에 개인의 잠재력, 소질, 특성 등 다양한 전형 요소들을 골고루 반영해 '베스트 오브 베스트' 학생들을 골라낸다는 교육적 목표를 입학사정관들이 설정했으나, 현실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주요 대학 입학사정관 출신인 션 캘러웨이 박사는 최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올해로 89년째를 맞는 미국 입학사정관제가 여전히 논란을 거듭하고 있는 이유를 생생히 해부했다. "미국 대학에서 입학을 위한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지원자의 데이터가 입학결정을 도와줄 뿐이다.

입학결정은 학생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대학 지침의 틀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는 '지침의 틀 속'의 의미를 부연했다. "입학허가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어떤 학생들을 어떤 비율로 입학시킬지는 철저히 대학 정책에 달려 있다." 대학 본부가 입학사정관제 실시 여부와 관계없이 신입생 선발에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쯤되면 기자가 장황하게 미국 얘기를 끄집어 낸 연유를 짐작할 것이다. 내년이면 입학사정관제 도입 90년을 맞는 미국이지만,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 입학사정관 딜레마는 진행형이다.

겨우 형체만 잡히는 수준인 우리나라 입학사정관제는 어떤가. 흡사 '브레이크 없는 벤츠' 같다. 제동장치를 갖추지 않고, 목적지도 불분명한데, 한껏 속도만 내는 형국이다. 결과야 어떻든 일단 달리고 보자는 식이다.

입학사정관제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대입 자율화의 핵심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새 정부는 깊은 수렁에 빠진 공(公)교육을 살리고, 통제 불가능한 것 처럼 보이는 사(私)교육을 잡을 '히든카드'로 입학사정관제를 선택했다. 방향은 백번 옳지만 제도를 시행하는 방법이 준비 안된 아마추어 같다.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노하우가 축적되지 않고 소프트웨어가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시행을 밀어붙이는 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의 결과를 낳을 뿐이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의욕은 넘치고 있다. 총 218억원의 '상금'을 입학사정관제 실시 대학에 줄 테니 요건을 갖춰 신청하라고 재촉한다. 대학의 목을 쥐고 있는 교과부 '엄명'인데 대학 측이 거부하는 것은 '항명'에 가까운 일이다. 40여개 대학이 '당근'을 덮석 받아먹기 위해 손을 벌릴 예정이다. 이런 와중에 일부 대학 총장들을 중심으로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신중론이 제기되고 있다. 검증 안된 제도의 성급한 도입을 경계하는 목소리다.

총장 시절 지역균형선발제를 선보였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일침은 그래서 교훈적일 수도 있겠다. "대입 전형은 기본적으로 대학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정부가 나서면 혼란만 생기지요. 입학사정관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무턱대고 밀고 나가는 건 위험합니다. 우리 대학 여건을 감안해야지요."

김진각 사회부 차장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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