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화첩 '중국역사회모본(中國歷史繪模本)'의 서문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나흘 전인 1762년 윤 5월 9일(음력)에 쓴 마지막 친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23일 이 화첩의 서문(사진)을 사도세자의 유고 문집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의 서문 등과 비교ㆍ분석한 결과 사도세자가 직접 쓴 글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중국역사회모본'은 '삼국지' '서유기' 등 중국 소설의 삽화를 편집한 화첩으로, 두 개의 서문에는 '임오년 윤 오월 구일 완산 이씨가 장춘각에서 쓰다' '… 여휘각에서 쓰다'는 후기가 붙어있다.
정 교수는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번역작업 중 장춘각과 여휘각이 사도세자가 거처하던 창경궁 통명전의 부속건물이라는 점을 확인했다"며 "'중국역사회모본'에 쓰인 글이 '능허관만고'의 서문에 변형된 형태로 게재된 점, 원문과 토의 필적이 같다는 점도 사도세자의 친필임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완산 이씨'를 영조의 딸 화완옹주,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혹은 영조 등으로 추측했다.
11쪽 분량의 '중국역사회모본' 서문에는 '서유기' '수호지' 등 당시 널리 읽히던 소설은 물론 '금병매' 등의 염정소설, 천주교 서적인 '성경직해(聖經直解)' '칠극(七克)' 등 83종의 책 제목이 적혀 있다.
'능허관만고'에는 이 서문이 변형돼 '화첩제어(畵帖題語)' '후제(後題)'로 실려있다. 서예사가인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는 "불(不) 자의 왼쪽 삐침이 강한 점, 산(山) 자의 아래 획이 가는 점 등 글씨를 쓰는 습관이 사도세자가 남긴 다른 문서의 글자와 동일하다"고 밝혔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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