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10원짜리 하나 구경 못했는데, 뭘 물어보는 겁니까?"
20일 오후 4시, 우리나라 중고품 매장의 원조로 불리는 서울 중구 황학동 시장. 이곳에서 30년째 냉장고와 씽크대 등 각종 영업용 중고 주방기기를 거래해온 이종복(71) 사장에게 "불황을 실감하느냐"고 묻자, 되돌아온 짜증 섞인 답변이다.
"작년에 비해 매출이 30% 넘게 줄었어요. 월세에 종업원 월급 주고, 창고 운영비까지 내려면 월 고정비만 500만원 이상 들어가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합니다.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가 없네요." 이 사장은 어려운 현실에 다시 부아가 치미는 듯, 녹이 슨 반찬 냉장고 청소를 위해 집어 들었던 철 수세미를 땅 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황학동 중고시장은 한때 창업을 준비 중인 영세 자영업자들이 쇄도해 호황을 누렸지만, 불황의 직격탄은 이곳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내수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가게를 정리해 물건을 팔려고 찾아 오는 자영업자들은 많은 반면, 중고 제품들을 구입하려는 고객은 크게 줄어 재고 물품을 쌓아두는 창고 운영비만 더 들어가는 실정이다.
"이게 지금 시장 바닥으로 보이세요? 이 골목을 자동차들이 이렇게 쌩쌩하게 달려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늘 사람들로 북적거려 발 디딜 틈이 없었거든요." 접시와 같은 식당용 중고 제품을 팔고 있는 김민성(60) 청우주방 사장은 시장 주변 곳곳을 손으로 짚어가며 예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이곳 사정을 전했다. 하루 매출 100만원 정도는 거뜬하게 올렸던 김 사장이지만, 요즘은 하루 20만원도 버겁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황학동 중고시장에서조차 도산과 줄폐업의 조짐이 엿보인다. 고문식(51) 황학동중앙시장상인회장은 "최근 몇 달 새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 업체가 잇따르고 있다"며 "하루 종일 손님 얼굴 구경도 못해본 채 가게 문을 닫고 들어가는 곳도 부지기수"라고 전했다.
고 회장도 이 곳에서 영업용 중고 가구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최근 매출이 3분의 1로 떨어져 적자가 쌓이면서 한숨만 늘어가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줄지어 쓰러지고 있다. 자영업의 위기는 동네 골목 구석구석에 위치한 음식점, 구멍가게, 세탁소, 목욕탕 등 서민경제 몰락의 신호음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자영업 대란'이 초읽기에 들어간 모습이다.
서울 은평구 연신내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송승탁(36) 사장. 그는 지난 달 가게를 내놓았다. 130만원에 달하는 월세와 껑충 뛰어오른 원재료값을 감당하지 못해서다. 3년 전 가게 오픈 당시만 해도 15㎏에 1만2,500원이던 양파는 2만원으로, 고기 굽는 데 필요한 열탄 가격은 6,000원에서 1만원으로 치솟는 등 원재료값은 쉼 없이 널뛰기 행진이다.
한 집 건너 고깃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경쟁 업소도 많이 생겼다. 급기야 하루 평균 100만원이던 매출이 30만원으로 주저 앉았다.
"먹는 장사하는 사람이 재료값 올랐다고, 메뉴에 바로 반영할 수 있습니까? 비용 줄이려고 아르바이트 쓰고 아내까지 가게에 나와 일손을 거들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내년이면 큰 아이가 학교에 가는데, 뾰족한 대책이 없네요." 가게 인수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며 업종 전환을 엿보고 있다는 송 사장의 목소리는 떨려왔다.
서울 구로 지역에서 7년 동안 컴퓨터(PC)방을 운영했던 김영균(41)씨도 지난 달 가게 문을 내렸다. 근처에 새 PC제품과 인테리어를 갖춘 PC방이 지난해 4월 들어서면서 월 평균 1,000만에 달하던 매출이 70% 이상 급감했기 때문이다.
"건물 임대료에 통신요금과 전기료, 인터넷 전용선요금, 게임사에 지불하는 비용 등을 합치면 월 고정 지출이 400만원 정도 들어갔는데, 다시 인테리어 비용을 써가면서까지 '제살깎이'식 경쟁을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김씨는 여전히 불확실한 경기 전망 탓에 새로운 자영업에 다시 도전할 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영세 자영업자들의 어두운 경영현황과 전망은 최근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소상공인진흥원이 2월말 상시 종업원수 5인 미만의 440개 업체를 대상으로 경기 동향을 조사한 결과, 최근 3개월간 매출 증가 업체는 9.8%에 불과한 반면 매출이 줄어든 업체는 40.9%에 달했다.
매출 감소 이유로는 '내수경기 위축'(30.6%)을 가장 많이 꼽았고, '물가 상승으로 인한 고객들의 씀씀이 감소'(20.2%)와 '자영 업체간 경쟁심화'(16.4%), '판매부진'(15.3%) 등이 뒤를 이었다. 향후 전망에 대해선 11.6%만이 '좋아질 것'으로 내다봤고, 50.3%는 '나빠질 것'이라고 답했다.
소상공인진흥원 조사연구부 노화봉 연구위원은 "관계 당국에선 시설 현대화와 서비스 개선 등 영세 소상공 업종의 취약점을 보완해 주면서 자연스럽게 자체 구조조정이 일어날 수 있도록 영업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며 "이런 불황기를 이용해 자생력을 확보한다면, 소상공인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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