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황사 때문인지 봄바람이 더욱 간절하다. 제주도에서부터 벌써 꽃 소식이 올라오기 시작 해 남쪽의 매화나 산수유 꽃들이 만개 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봄은 언제나 성급한 듯하다. 언 땅에서 올라오는 개구리가 그렇고,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피워내는 버들강아지 순이 그렇다. 유채며, 개나리 매화 진달래들은 일찌감치 꽃망울을 먼저 터트리고 난 후에 파란 잎사귀들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잠시 보기에는 좋으나 어른들 표현대로 좀 경망스러운 꽃들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 아마 그 절정은 벚꽃인 듯싶다.
이런 감상은 그야말로 한갓 감상일 뿐 실제 봄 꽃들의 위와 같은 양상은 과학적 근거가 있을 것이다. 이왕 봄에 대한 단상의 감상을 시작 했으니 그 과학적 근거를 찾아 알고 싶지는 않고, 봄! 그것도 3월의 봄은 성급함과 미숙함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몇 해 전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랬는지 기차를 타고 전남 구례 인근까지 산수유 꽃을 보러 간적이 있었다. 연일 여러 매체에서 봄소식을 전하면서 봄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있다고 부추겼다. 아직 희뿌연 겨울의 끝 자락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던 터이어서, '그래 난생 처음 꽃을 보러 가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부추겼던 듯하다.
다만 제주도는 너무 멀고, 남쪽 섬이야 원래 따뜻한 곳이어서 별로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는데, 한반도의 남쪽 끝 자락에 산수유가 피어있는 마을이 있다는 것에는 진짜 봄이 거기서부터 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하여, 기차표를 예매하고 하루 일정을 짜는데 이미 마음은 저 남쪽에 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출발하는 날 아침, 마음이 들떠서 서울은 꽤 쌀쌀 했는데도 남쪽으로 가니까 하면서 얇은 옷을 입고 출발했다. 서울을 벗어나면서 날이 밝아져 와야 하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도 들뜬 마음은 좀체 가라앉지는 않았던 것 같다. 드디어 기차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그 유명한 산수유 마을에 도착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던 그 마을의 수려함과 어우러진 노란 산수유 꽃은 정말 아름다웠다. 거기까지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노란색의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한기가 여전히 매서웠고, 가까이서 본 산수유들은 어떤 잎사귀들도 없이 그저 그렇게 노란 꽃들만이 무성 할 뿐이었다. 그곳의 주민들도 아직 겨울 옷들을 다 벗어내 버리진 않았다. 나의 일행은 얇은 봄 옷을 입은 채 덜덜 떨면서 산수유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여기저기 남녘의 꽃 소식이 전해오자 또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엊그제 그 산수유 마을 어귀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꽃은 저 혼자 화사하고, 우리는 여전히 푸석한 겨울 얼굴에 어깨까지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자세다 싶었다. 다시 겹쳐지는 사진들-각종 입학식 사진들-의 자세와 똑같았다. 그 중의 압권은 역시 대학 입학 사진이다. 특히 나와 같은 완전 교복세대가 처음으로 입은 정장차림의 사진은 지금이라도 다른 옷을 입고 얼굴은 포토샵을 해서 바꿔놓고 싶은 심정이다. 원숙한(?) 고3에서 어떻게 한 순간에 그런 얼치기 같은 자세와 표정이 나올 수 있는지, 그게 다 3월의 봄 탓이라고 생각 한다.
그 성급하고 미숙한 봄이 시작 되었으니,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성숙과 완숙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할 밖에.
이미연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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