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내 포르트 마이요 지하철역에서의 일이다. 50대 흑인여성 하나가 자기 또래 백인여성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막판엔 파리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라시스트!"(인종차별주의자) 소리까지 지르며 삿대질을 해댔다. 사연인즉 전철 안에서 발을 밟고도 백인여인이 미안하다는 사과를 안 했다는 것.
내가 정작 놀란 건 그 다음이다. 백인여성이 즉각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상냥한 얼굴로 사과를 한 것이다. 그 토박이 파리지앤의 늘품이 현지특파원 마치고 귀국한 지 20년 되는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도 거듭 느끼는 거지만 파리의 아름다움은 결코 센강이나 에펠탑에 있지 않다. 전철역에서 내보인 파리지앤의 금도(襟度)와 흑인여성의 당당함-바로 그 '도시의 품격'에 있다고 지금도 나는 믿고 산다.
오늘 유엔이 정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을 맞아 인권의 상징 도시 파리, 그 인권의 '현장' 지하철역 풍경을 떠올림도 그래서다. 발족 두 달째를 맞는 사단법인 '국경 없는 세상'의 꿈 역시 예의 도시 품격에 걸고 있다. 서울의 품격에 걸고 있다.
지금 한국에는 100만이 넘는 외국인이 살고 있다. 동남아 각지에서 건너온 아시아계 근로자들이 주종을 이룬다. 파리 전철역의 흑인여성이 당당했듯, 그래서 결국 파리가 더욱 돋보였듯,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 근로자들도 흑인여성처럼 당당하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서울이 지녀야 할 품격이다. '국경 없는 세상'은 그런 취지로 만들어졌다.
국내 외국인들 모두가 우리한테는 이를테면 과객(過客)이다. 과객은 매사에 목마르고 국경에 묶여 사는 법. 뼈 빠지게 모은 돈을 본국에 부칠 방법도 모르고, 은행을 찾아간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돈다발을 은닉하다 보면 분실하거나 강탈 당하기 십상이다.
'국경 없는 세상'이 발족과 함께 전화 콜센터(국번 없이 1577-8456)를 개설, 이들 과객에게 송금 방법을 우선적으로 가르쳐 온 것도 그래서다. 은행에 가지 않고도 휴대전화를 몇 번 클릭하면 언제 어디서나 본국 송금이 가능하도록 통신과 금융을 한데 묶어 준 것이다.
과객들은 휴대전화를 구입하는 데도 국경에 갇혀 있다. 주민등록증이 없어 휴대전화를 구입할 수 없고, 적당히 구입하더라도 '선불 충전'이 적용돼 통화 중 교신이 끊기기 십상이다. 이런 애로가 센터에 신고될 경우 '국경 없는 세상'은 이들이 내국인과 동등한 지위에서 휴대전화를 지닐 수 있도록 즉각 조치를 취해준다.
한국어를 모르는 신고자를 위해 영어, 베트남어, 몽골어, 중국어, 태국어, 스리랑카어를 쓰는 원어민 직원 16명을 상근 배치하고 있다. 또 국내 적응과 정착, 주거지 선정과 의료알선은 물론 내국인과의 교류 증진을 위한 교육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최종 목표는 '국경 없는 세상'을 해외에도 수출, 말 그대로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구축하는 데 있다.
거듭 '국경'을 생각해 본다. 환자를 치료하는 데 국경은 이미 헐린 지 오래다(국경 없는 의사회). 기자가 취재하는 데도 국경은 뚫려 있다(국경 없는 기자회). 이제 과객들을 당당하게 만들기 위해 국경이 다시 한 번 헐려야 할 때다.
그래야 서울의 품격이 살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시민의 인격도, 나라의 국격(國格)도 살아날 것이다. 과객한테 잘해 주는 것만이 그 첩경이다. 우리도 어차피 한 세상 살다 떠나는 과객 아니던가!
김승웅 사단법인 국경 없는 세상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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