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겨우내 잠잠하게 웅크리고 있던 만물을 깨우는 바람. 시인의 마음을 살랑이는 바람. 시인은 풍경이 된다. 김용택(61) 시인의 신작 시집 <수양버들> (창작과비평 발행)은 '나비가 날고, 여기저기 꽃들이 화사하게 만개하는' 봄날의 풍속화다. 수양버들>
고향인 섬진강변의 농촌 초등학교(임실 덕치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평생 자연의 속도에 순응하며 시를 써온 김씨에게 봄은 하늘하늘 바람에 살랑이는 연분홍빛 살구나무 꽃잎, 여인의 치맛단처럼 강물에 끌릴 듯 말 듯 드리워진 수양버들, 눈을 멀게라도 할 듯 찬란하게 흰 나비다.
봄은 아찔하다. '까만 가지 끝에 핀 꽃일수록 더 붉고 꽃빛은 숨이 턱에 찹니다. 이러다가 자지러지겠어요. 이러다가는 저 꽃이 생사람 잡겠어요. 저 꽃빛에 홀려 따라가다가는 숨 넘어가겠어요.'('구이'에서).
농밀하고 찬란한 춘경 속의 시인. 하지만 아름다워서 서럽고, 서러워서 아름답다던가. 먼 산을 바라보며 섬진강변 꽃길을 거닐던 시인에게 서러움과 슬픔이 불현듯 밀려온다.
'봄이 와서/ 꽃들이 천지간에 만발하고/ 나는 길을 잃었다/ … 강변을 너무나 오래 걸어서/ 내 발등에는/ 이슬이 아닌/ 서러운 꽃잎들이/ 날아와 박힌다'('울어라 봄바람아'에서). 몇몇 시편에서 시인은 슬픔과 서러움의 비밀을 은밀히 흘린다. 그 비밀의 한 자락은 어느덧 이순(耳順)을 넘어선 시인에게 버거워지는 세월의 무게다. 하나씩 둘씩 도시로 떠나간 이웃들, 어느덧 세상을 떠나는 친구들….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요/ 난 남았습니다… 쓸쓸하게 남아/ 때로 울기도 했습니다'('자화상'에서). 젊어서 죽은 마을동무 금화를 떠올릴 때 그는 에두르지 않는다. '… 금화를 생각하면 슬픔이 강물처럼 내 발밑까지 물결진다. 지금 살아있으면 환갑이다./ 환갑이라고 쓰니, 환갑이 서럽다…'('금화'에서).
슬픔의 다른 한 자락은 대물림되는 농촌의 가난이다. 농촌 초등학교에서 그가 38년 간 길러낸 꽃망울 같은 아이들. 그가 가르친 아이가 아비가 되어 딸을 낳았지만 농촌은 여전히 빈궁하다.
도시로 간 아비는 '도시의 작은 골목길 1톤 트럭 잡화장수'('사랑'에서)가 되었고, 시인이 가르쳤던 그 잡화장수의 딸 세희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란다. '세희가 달려와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고 작은 손,/ 가난은 배고픈 봄날처럼 길고 멀다… 내 어찌 눈물을 감추랴'('세희'에서). 일요일이 되어도 일기장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는 세희. 눈 어두운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신해 세희의 손톱을 깎아주는 시인은 목이 멘다. '깎아도, 깎아도 길어나는 손톱처럼/ 가난은 잘리지 않는다.'('손톱'에서)
지난해 8월 29일 "야들아, 느덜이 하도 징글징글허게 말을 안 들어서 나 인자 핵교를 그만둘란다"라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농촌아이들을 달래며 정년퇴임한 김씨.
교편을 놓은 뒤 전업 시인이 되어 기후변화협약과 제3세계 아동의 기아문제 등 '글로벌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는 이 시집을 통해 고향의 아이들로부터 자신이 떠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 농촌의 가슴 아픈 현실은 내 삶 속에 각인된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