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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국가의 존재 이유

입력
2009.03.2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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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나라가 다 있다. 예멘 테러 사건에 대한 정부 대응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5일 관광객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자살 폭탄테러 직후부터 의도적으로 한국인을 겨냥한 테러일 가능성은 점쳐졌다. 18일 정부 신속대응팀과 유가족이 탄 차량에 대한 자살 폭탄테러가 감행된 후 그 가능성은 훌쩍 커졌다. 두 번째 자살테러가 신속대응팀과 유가족을 직접 겨냥한 것이라는 예멘 당국의 발표로 그 가능성은 분명한 현실로 다가왔다. 19일 새벽의 일이었다.

그런데 첫 테러 때 "한국인을 겨냥한 테러로 보기 어렵다"던 곽원호 주 예멘 대사는 두 번째 테러 뒤에도 "알 카에다가 굳이 한국인을 표적으로 2회 연속 테러를 저지를 만한 근거를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런 현지의 시각은 본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외교통상부는 19일 저녁까지도 일련의 테러가 한국인을 직접 겨냥했을 가능성에 대해 유보적 자세를 보였다. 심지어 어제도 유명환 장관은 예멘 테러가 한국인을 겨냥했는지 여부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여러 가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 있다"고 말했다.

앞세워야 할 '국민 보호'

원칙적으로 외교 당국의 신중한 자세는 미덕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마땅하다. 테러 주체나 의도 등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다른 가능성도 거론되는 마당에 책임 있는 당국자가 어떤 '단정'을 내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는 이런 원칙론이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우선 격식이 중요한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국민이 우연한 사고에 휘말린 게 아니라 명백히 적대적인 공격의 표적이 되어 목숨까지 잃었다. 공격의 주체나 속셈이 무엇이든, 한국민에 대한 적대성의 표현이란 사건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테러의 최종 주체나 구체적 의도가 의문의 여지 없이 '단정'할 수 있을 정도로 밝혀지는 예도 드물다.

따라서 이런 적대적 행위에서 가장 먼저 도마에 오를 것은 테러 주체나 의도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보호의무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응징'을 포함한 다양한 '재발방지책'이 다퉈질 만하다.

결과적으로 국민 보호의무에 충실하지 못함으로써 정부는 정보 부족 또는 예방조치 실행력의 결여를 드러냈다. '단정'이 불가능하다는, 뻔한 얘기를 강조하는 외교 당국의 태도는 우선 이런 잘못을 흐리려는 것으로 비치기 쉽다. 나아가 적대적 행위에 대한 구체적 대응책이 마땅찮은 현실을 감안한 '반응 식히기' 의도마저 엿보이게 한다. 자살테러가 처음부터 한국민을 겨냥해 기획된 것이라면, 그것은 곧 전체 한국민과 국가에 대한 적대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응징'을 포함한 적절한 대응 수단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적극적 행동을 요구하는 여론은 정부 당국자들에게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니다.

정부 당국의 속마음을 이렇게 더듬어가다 보니 그 동안 그리 좋아 보이지 않던 미국의 일방적 자국민 보호 자세나 '납치 문제'에 대한 일본의 집착이 오히려 부럽게 느껴질 정도다. 적극적인 '국민보호' 인식을 갖고서도 실제 대응에서는 개별 대책 각각의 부작용과 역효과까지 고려해 적절한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데도, 정부가 지레 겁부터 먹고 있는 듯해서다.

'민족'인식의 함정인가

정부의 소극적 자세가 결국 국민의 전반적 인식을 바탕으로 했으리란 짐작은 더욱 우울하다. 공교롭게도 속을 알 수 없는 북한의 대남 정책과 시기적으로 겹치면서, 국민 사이에 팽배한 '민족' 인식이 '국민'에 대한 인식, 나아가 '국민 보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부쩍 심해진다.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형성된 '민족' 정서를 토대로, 엄연히 별도의 정치적 실체인 북한을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다 보면 남쪽 '국민'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다국적 관광객 집단을 겨냥한 테러와 한국민을 겨냥한 테러의 현격한 차이를 흐리는 인식의 함정은 아닐까.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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