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훈 "아이파크전 솔직히 겁난다"
대한민국 야구가 세계무대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77년 대륙간컵 야구대회였다.
이때 한국 팀을 이끈 감독이 김응룡 전 해태 타이거즈(현 삼성 라이온즈 사장) 감독 이었다.
그러나 대륙간 컵은 명실공이 세계대회는 아니었다. 초청대회 형식을 띈 국제대회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세계야구 정상에 처음으로 오른 것은 1982년 서울에서 벌어진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였다.
당시 대한민국 팀 감독은 어우홍씨였다.
그러나 그 대회에는 세계최강 쿠바가 빠졌다.
당시 쿠바는 한국과 수교를 맺고 있지 않아서 그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쿠바는 1969년 이후 지난 2008 베이징 올림픽 까지 자신이 출전한 세계규모의 국제대회에서 40연속 결승전에 오른 명실공이 세계 최강 야구 국가다.
대한민국은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미국, 일본, 쿠바 등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대한민국 팀 감독은 두산 베어스 김경문 감독이었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은 미국이 마이너리그 선수들을 출전시키는 등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푸에르 토 리코 등 야구 강국들은 메이저리거들을 출전시키지 않았었다.
대한민국 야구는 그밖에 98 방콕 아시안게임, 2002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그리고 제1회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즉 WBC 대회 4강 등의 성적을 올렸었다.
따라서 국내대회 성적은 제외하고, 국제대회 성적만 놓고 볼 때 지금까지는 어우홍, 김경문, 김응룡, 김인식 등이 비슷한 성적을 올렸다고 볼 수 있다.
김인식 감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메이저리거들이 거의 모두 출전한 제1회 WBC 대회에서 대한민국 야구를 4강에 올려놓음으로서 ‘국민감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김인식 감독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도 대한민국 야구를 금메달로 이끌었었다. 그리고 이번 대회 4강을 확보 해 놓은 상태에서, 만약 준우승 이상의 성적을 올린 다면 역대 최고의 감독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김인식 감독은 국내대회 성적도 만만치 않다.
국내 프로야구에서 10번 우승(해태 타이거즈 9번 삼성 라이온즈 1번)을 차지한 김응룡 감독과 3차례 우승 맛을 본 김재박 감독이 있지만, 김인식 감독도 95년 OB 베어스와 2001년 두산 베어스에서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었고, 86년에 해태 타이거즈 수석코치로 김응룡 감독을 보필해서 89년까지 4연패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김인식 감독을 대한민국 야구 최고 감독의 반열에 올려놓는 이유 가운데는, 경기 외적인 요건 즉 야구인으로 의리를 목숨처럼 생각해 많은 후배들이 따르고 있다는 점도 빼 놓을 수가 없다.
김인식 감독은 90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취임해 3년 동안 팀을 맡았다가 경질 되는 과정에서, 자신 때문에 자신이 데리고 있던 코칭 스탭들이 실업자가 된다는 사실을 깨닿는다.
김인식 감독의 의리는 2003년 두산 베어스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났다. 당시 두산은 선동열씨는 감독으로 영입하기 위해서 김인식 감독을 부사장으로 발령을 내려 했었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은 그렇게 되면 자신은 영광스럽지만 자신이 데리고 있던 코치들이 전원 실업자가 될 것이 뻔해 부사장 제의를 거절하고 야인(野人)생활을 자처했다.
김인식 감독은 두산 베어스를 그만 둔지 꼭 1년 만에 한화 이글스 사령탑에 복귀하면서 자신을 따르던 후배들과 한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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