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는 고래의 바다, 울산은 고래의 땅이다.
'고래의 꿈'이 맴도는 울산은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국보 285호인 고래가 새겨져 있는 '반구대 암각화'와 천연기념물 126호 '극경회유해면'(克鯨廻遊海面ㆍ귀신고래가 다니는 바다) 등이 있는 곳이다.
선조들은 동해를 경해(鯨海ㆍ고래의 바다)라고 불렀을 정도로 우리 바다에는 고래가 많이 살았다. 실제 세계 포경사는 18~20세기 러시아 미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일본 등 열강의 포경선들이 고래기름을 얻기 위해 떼지어 동해로 몰려들어 마구잡이로 고래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해방 직후 울산 장생포를 중심으로 고래를 잡기 시작해, 전세계적으로 포경이 금지된 1986년까지 계속 잡았다. 60년대까지는 대부분 길이 15m에 이르는 참고래를 잡다가 개체수가 줄면서 1톤 크기인 밍크고래로 바뀌었다.
하루 평균 5,6마리 정도가 장생포항에 들어와 해체됐다고 한다. 당시 돼지고기보다 싼 가격의 붉디 붉은 고래고기는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에게 고마운 단백질 보충 수단이었다. 포경이 금지된 지 30년이 흘렀지만 울산에는 아직 고래에 얽힌 지역 정서가 짙게 남아 있다.
지금도 연간 수백마리의 고래가 그물에 걸려 잡힌다. 고래가 잡히면 해경에서 검사해 작살 등을 사용한 사냥의 흔적을 살펴본 후 이상이 없을 경우에만 경매에 부칠 수 있다. 전국에서 잡히는 고래의 거의 대부분은 울산으로 향한다. 이곳만한 고래고기 소비처가 없기 때문이다.
고래는 꾀가 있는 짐승이고 또 가족애가 투철하다고 한다. 고래 사냥꾼들에 따르면 수컷을 쏘면 암컷 고래는 새끼를 끼고 천리만리 도망가는데, 암컷을 쏘면 수컷은 도망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고 한다.
그래서 고래 포수들은 암컷을 먼저 노려 2마리를 함께 잡았다. 포경선의 어부들은 수컷을 먼저 잡으면 수컷을 쏜 자신을 자책하고, 잡힌 놈을 보며 같은 수컷으로서 비애의 동질감에 또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장생포 주민들은 지금도 고래로 흥청거렸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포경선이 고동을 울리며 귀환할 때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축제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고래를 해체하다가 구경 나온 사람들에게 고기를 한 덩이씩 던져주는 등 인심도 후했다.
예전에 비해 썰렁해졌지만 지금도 장생포를 걷다 보면 고래 향이 풍긴다. 울산의 별미 중 단연 으뜸인 고래고기를 맛보기 위해 장생포에 있는 '원조할매집(052-261-7313)'을 찾았다.
모둠을 시키니 우네(가슴살), 오베기(꼬리), 육회, 수육, 내장, 껍질 등 다양한 고래고기가 한 접시 가득 담겨 나온다. 부위에 따라 12가지 맛이 난다는 고래고기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이 집의 며느리 신미화(42)씨는 "고래고기를 처음 먹는 사람은 수육과 육회가 무난하다"고 권했다. 고래 특유의 누린내가 덜하기 때문이다.
고래고기는 부위에 따라 찍어 먹는 소스가 다르다. 수육은 멸치젓갈이나 소금, 생고기는 고추장, 우네는 고추냉이를 푼 간장, 오베기는 초고추장 등과 어울린다. 상 위에는 일반 횟집에서 나오는 상추나 깻잎이 보이지 않는다.
사장인 박숙자(66)씨가 직접 나와 "고래는 야채로 싸 먹으면 맛이 안 난다"고 설명해준다. 대신 묵은 김치나 부추김치로 싸 먹어야 더 맛있다고 찬찬히 일러준다. 박 씨는 2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로부터 이 일을 이어받았다.
맛의 비결에 대해 박씨는 역시 고기의 신선도가 좌우한다고 설명했다. 고래가 많이 날 땐 한 달에 3,4차례 경매가 이뤄지는데 그 경쟁이 치열하다. 신선도 좋은 것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따내야 한다. 1마리 통째로 구입해와 재빨리 해체해 냉동 보관하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다.
유명 고래고기집에서 취급하는 고래는 밍크고래다. 보통 '곱시기'라 불리는 돌고래는 상대하지 않는다. 돌고래는 가격이 싼 대신 냄새가 심하고 육질이 떨어져 고래 맛을 아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장생포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래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지방이 부드럽게 퍼지면서 고소한 맛이 입안에 번져간다. 풍미도 구수한 향도 고래 크기만큼이나 묵직하게 번져간다.
울산의 장생포와 남구 달동 등에 고래고기를 취급하는 음식점이 80여 곳 된다. 네 명이 먹을 만한 모둠 한 접시는 10만원 선이다.
울산=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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