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아래에서는 차명계좌라 하더라도 예금 명의자를 예금주로 봐야 한다는 19일 대법원의 새로운 판결로 차명계좌를 이용한 기업들의 비자금 조성이나 불법자금 거래가 어려워지게 됐다.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시행된 이후에도 상당수 기업들은 임직원 명의로 주식이나 자금을 관리하고, 뇌물 등 불법자금의 거래도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것이 관행처럼 계속돼 왔다. 지난해 4월 삼성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에서 삼성이 1,199개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계열사 주식을 매매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또 삼성화재 재무 책임자가 차명계좌를 통해 9억8,000만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차명계좌를 개설해 준 금융회사는 금융실명거래법 위반으로 제재를 받았지만, 주식 및 예금 소유권에 대한 논란은 없었다. 지금까지 판례가 명의자가 아닌 자금 출연자(실소유자)의 소유권을 인정해왔기 때문이다.
금융실명제 이전에는 예금 명의자 표시가 큰 의미가 없었던 거래현실을 중시해 법원도 차명 여부와 상관 없이 실소유자를 예금주로 보는 입장을 취했다. 금융실명제 이후에는 원칙적으로 예금 명의자를 예금주로 봤지만, 실소유자와 금융회사 간에 명시적 또는 묵시적 약정이 있는 경우에는 차명계좌라 하더라도 실소유자를 예금주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이 같은 판례가 금융실명제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이번에 판례를 변경한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로 예금 명의자와 예금주가 일치하게 되어 예금에 관한 법률관계가 명확해지고, 자금 실소유자는 차명거래를 할 경우에 안게 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명의로 직접 거래할 것이므로 투명한 예금거래 질서 형성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변경된 판례를 악용하는 사례도 예상돼 보완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예금 소유자가 한 사람인데도 명의를 분산해 예금자보호규정을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판례변경을 가져온 사건의 당사자인 이모씨의 경우, 기존 판례에 의하면 부부 명의로 각각 소유한 2개의 계좌가 모두 자금 출연자인 남편의 것으로 인정돼 남편만 예금보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판례가 바뀌면서 두 명 모두 예금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례 변경에 따른 예금자 보장 범위에 대해서는 별도의 판례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부부가 예금자 보호규정을 무력화 시킬 의도를 가지고 명의 분산을 한 것인지를 따져 판단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판례나 보완 규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예금자보호법 적용에 있어 혼선이 예상된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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