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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침팬지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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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침팬지의 정치'

입력
2009.03.23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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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세계를 관찰해 보면 그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침팬지의 사회생활을 연구한 학자들은 지위가 낮은 수컷이 다른 수컷과 동맹을 맺어 권력을 쟁취하고는 차지한 권력의 일부를 동맹자에게 나눠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투쟁의 성공을 위해서만 서로 협조한다. 침팬지의 사촌 격인 보노보는 투쟁보다는 협동과 친화의 전략을 구사하여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은 두 가지 모두를 진화시켰고, 여기에 더해 공정한 경쟁의 룰이라는 사회 장치까지 발명했다.

고교등급제의 이기적 경쟁논리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 진화라고 하면 협동과 친화보다는 피범벅이 된 이빨과 발톱만을 떠올린다. 무한 투쟁이 바로 자연의 법칙이므로 인간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우긴다. 진화란 이기적 유전자들의 생존 경쟁이므로 유전자를 운반하는 그릇인 우리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많은 교육비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학생이 대부분인 특목고를 대학입시에서 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학도 경쟁을 해야 하는데 이왕이면 지불능력이 있고 이미 사교육으로 일정 정도의 조건을 갖춘 학생을 받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인데 대학이라고 이기적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진화와 인간 본성에 대한 지독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지만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인 것은 사실이다. 당당히 주장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공론화한다면 관철 못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그 방침을 공개하지 않은 채 꼼수로 장막 속에서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것이다. 최근 벌어진 고교등급제 의혹 사건이 바로 그런 경우다.

고교등급제가 아니라는 대학교육협의회의 알쏭달쏭한 발표가 있었지만, 경기도 전체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를 보면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이 무척 커 보인다. 그런데도 당사자인 고려대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다. 진위는 법정에서 가려지겠지만 의혹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고려대는 이미 명성에 먹칠을 한 꼴이 되어버렸다. 정당한 경쟁의 룰을 가르쳐야 할 교육기관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무력화하고 이빨과 발톱의 논리만을 따랐으니 말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KAIST가 정원의 5분의 1을 학교장 추천과 입학사정관 제도를 통해 무시험으로 뽑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고 있다. 고려대를 포함한 다른 대학들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나섰다. 입학사정관이라는 간판을 내세워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는 의도는 엿보이지만 올바른 신입생 선발로 우리 교육을 살리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침팬지의 본능적 논리는 있으되 보노보의 직관적 전략과 인간의 고민이 없다.

하지만 서남표 총장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한줄기 희망이 보인다. 적어도 문제에 대한 진단이 정확하고 그것에 대한 접근방식이 진솔하다. 그의 말 가운데 중요한 것을 옮겨보자. "추천 받은 학생의 학교로 찾아가 학생과 다른 선생님들을 인터뷰할 것이다" "사회적 경험에서 만들어진 인성까지 보겠다" "그룹 토론, 집중 심층면접 등을 통해 뽑겠다" "사교육을 받은 학생이 감점과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KAIST의 접근방식에 기대

이쯤 되면 침팬지들은 당장 나서서 아우성일 것이다. 어떻게 공정성을 담보하느냐, 미국이 50년의 시행착오를 거친 제도를 준비도 없이 몇 년 사이에 시행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당연한 우려다. 서남표 총장도 그 점을 인정한다. 그래서 말한다. "그런 문제로 소송 등 문제가 발생한다면 내가 법정에 서 책임질 용의가 있다"

자신감과 책임감이 묻어나는 답변이다. 미국의 경우 어떤 고등학교 출신이라도 (학교 평균 성적과 관계없이) 학창시절 그 학교에서 성적이나 활동 측면에서 모두 우수한 리더십을 보였던 학생이 성공한 CEO가 되더라는 조사결과도 덧붙인다. 보노보와 인간의 사회성이 침팬지의 이기적 투쟁보다 경쟁력이 있다는 말이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 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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