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천구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별관. 지은 지 10년 된 4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에선 수많은 범죄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곳이 바로 첨단 과학수사 기법으로 꼽히는 DNA 분석의 메카, 유전자분석과가 자리한 유전자감식센터다. 올 초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점퍼에 묻은 극미량의 핏자국에서 확고한 여죄 증거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11일 오후 유전자분석과를 찾았을 때 한면수(50) 과장은 컴퓨터 앞에서 밀려드는 DNA 감식 의뢰물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하루 의뢰 건수는 100여건으로, 지난해보다 20%쯤 늘어났다.
담배꽁초, 씹던 껌, 페트병, 옷가지 등 한 건 당 많게는 수십 종의 의뢰물이 쏟아진다. 그래서 한 과장은 자기 부서를 '쓰레기통'이라고 부른다.
이런 허접스러운 수거물에서 범인을 밝혀낼 결정적 증거를 찾는 공정은 2층 증거물 채취실에서 시작된다. 연구원들은 이곳에서 머리카락, 상피세포, 혈흔, 정액 등 의뢰물에 묻은 다양한 부위의 세포를 확보한다.
"접촉하면 반드시 물질 교환이 일어난다"는 프랑스 법의학자 에드몽 로카르의 말은 유전자 수사를 통해 추상에서 현실이 됐다. 한 과장은 기자와 마주앉은 탁자를 가리키며 "여기에 튄 침으로도 당신 신원을 밝힐 수 있다"며 "최근 카 오디오 버튼에 남아있던 실종자의 유전자를 토대로 사건을 해결한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채취된 증거물은 작은 플라스틱 튜브에 담겨 냉동 보관된다. 냉장고를 빼곡히 채운 튜브 중엔 지난해 11월 서울 대학로에서 발굴된 유골 14구의 시료도 있었다. 분석을 거의 끝마쳐 2주 후면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다.
정종민 연구사는 "유전자 분석에서 손놀림과 경험이 중요한 증거물 채취 과정이 가장 까다롭다"고 말했다. 특히 옷에 묻은 혈흔을 찾거나, 여러 명의 혈흔을 분리해내는 기술은 고도의 경험이 요구된다. DNA는 외부 충격엔 강하지만 습기, 세균, 자외선, 열에는 쉽게 분해돼 증거물 채취는 더욱 조심스럽다.
3층에선 채취된 시료에서 DNA를 추출하는 과정을 거친다. 혈흔 등 DNA 양이 많은 부위는 자동 추출기를 이용하지만, 모근 없는 머리카락이나 뼈 등 필요 분량의 DNA를 얻기 어렵거나 오염된 시료는 여전히 연구원들의 손기술이 필요하다.
한국의 DNA 검출 실력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났다. 2004년 동남아 쓰나미 사태 때 파견된 국과수 요원들은 46개국 수사팀 중 가장 먼저 한국인 사망자 20명의 신원을 확인했고, 2006년 서래마을 영아유기 사건 때는 칫솔에서 채취한 DNA로 프랑스인 부모가 범인임을 밝혀내 프랑스 경찰을 놀라게 했다.
추출된 DNA에는 3만 개 정도의 유전정보가 담겨 있지만, 신원을 밝히는 데는 일부 구간이면 충분하다. 해당 구간을 분석하기 좋게 복제하는 증폭 과정까지 거치면 4층에서 DNA 분석이 이뤄진다.
이곳에선 센터 내에서 가장 비싼 장비(1억5,000만원)인 자동염기서열분석기 3대가 시료를 10여 개 항목의 디지털 정보로 전환한다.
부계 혈통을 추적할 땐 Y염색체 DNA를, 모계 혈통은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는 등 수사 목적에 따라 여러 방향의 감식이 가능하다. 한 과장은 "현재 기술로 1조 분의 1까지 개인 식별이 가능하다. 쌍둥이를 제외하면 60억 인류를 전부 구분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사 현장에서 유전자 분석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져 2002년 1만2,621건이던 의뢰 건수가 지난해 7만 건에 육박했다. 수사 관행에도 변화를 몰고 왔다.
진영근 양천경찰서 형사과장은 "유전자 정보가 들어맞으면 용의자도 쉽게 범행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인권 수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치솟는 위상만큼이나 업무 부담도 폭증하고 있다. 한 과장은 "실제 분석을 담당하는 연구관, 연구사는 서울 본소 20명, 지방 5개 분소 15명 등 35명인데, 그나마 본소 실종아동 전담팀 5명을 제외하면 연구원 30명이 전국 범죄를 도맡고 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지난해 기준으로 1인당 2,300건을 처리한 셈이다.
이훈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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