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막장이라고 욕을 먹을수록 인기다. 막장이 뭔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갈 데까지 다 간 암담함, 생존을 위한 처절한 비도덕, 비윤리의 공간이다. 이 오명(汚名)이 드라마에 적용되면, 그 드라마는 암담하게 이야기 파괴적이고, 무모하도록 선정적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벌써 사라졌어야 할 드라마들이다. 그런데 아니다. 진짜 막장의 인생들처럼 근근히 생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압도적인 시청률을 올리며 가장 화려하게 군림하고 있다. 막장의 군림, 도대체 이 역설은 무엇에 의해 가능한가?
통속극 전통의 새로운 재현
<아내의 유혹> 은 남편의 배신으로 죽은 줄 알았던 한 여인이 완전히 다른 여인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을 배신했던 사람들에게 복수를 해가는 내용이다. 막장의 딱지가 붙은 이유는 첫째는 사건들의 개연성 부재이고, 둘째는 살인 불륜 폭력 사기 등이 거의 일상화한 점이다. 이야기 전개는 작위적이고,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돼 있다. 아내의>
<꽃보다 남자> 는 재벌층 자녀를 위한 특수학교에 '서민' 여학생이 들어가 좌충우돌하면서 신데렐라가 되어가는 이야기다. 짤막한 앞 문장으로도 금방 드러나듯이 무슨 안드로메다에서 어느날 떨어진 드라마처럼 지구인의 리얼리티를 갖지 못한다. 만화가 원작인 만큼 한 가지 근거와 목적으로 조립된 캐릭터들은 젊은 배우들의 미숙한 연기와 맞물려 감독에 의해 조작되는 로봇 같다. 이야기는 목적만 있지, 그 목적을 위한 감정과 개연성의 설정에는 번번이 실패한다. 꽃보다>
세상이 점점 각박하고 막장화 하기 때문에 이 드라마들이 인기를 얻는다고 말하는 건 2,000년 전부터 언제나 말할 수 있었던 속류 사회학이다. '욕하면서 본다'는 말도 궤변이다. 싫어서 보는 것은 초등학교 단체관람 이후로는 통하지 않는다. 선택권이 있는 상황에서 싫어서 보는 것은 세상에 없다. 욕하면서 보는 게 아니라 흥미가 있어서, 재미가 있으니까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드라마들이 오래된 통속극 전통들을 아주 집약적으로 주저 없이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태도와 자세만은 아주 새로운 것이다. 주로 주부 시청자 대상의 아침드라마의 전략이 좀 더 세련된 탈을 쓰고 밤시간에 시도되는 것이다.
모든 문화적 창작물은 물론 감정의 동요를 목적으로 한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재미란 결국 자신이 느낀 감정의 동요인 것이다. 공포물은 무서워야 하고, 코미디는 웃겨야 하며, 스릴러는 초조한 감정의 동요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 동요의 폭이 클수록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감정적 동요는 항상 관객의 공감을 전제로 한다. 공감은 격렬한 감정적 동요 뒤에도 따뜻한 정화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 낸다. 이런 종류의 경험을 관객에게 이끌어내는 것은 장면마다 즉물적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고 섬세한 전체 이야기 설계와 깊이 있는 캐릭터 설정으로 가능한 것이다.
환타지와 욕망의 대리 만족
통속극은 감정적 동요에만 집중한다. 이야기와 캐릭터의 일관성은 없지만 장면마다 강력하게 감정적으로 요동치고, 인물마저 꽃 미남으로 미술화한 드라마의 때깔은 화려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들은 환타지로 변한다. 환타지의 대리만족은 <꽃보다 남자> 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내의 유혹> 처럼 일상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복수와 분노의 드라마도 일상에 숨겨진 사람들의 욕망을 대리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짜릿한 쾌감과 중독이 그 뒤에 따른다. 아내의> 꽃보다>
그래서 차라리 두 드라마는 거대한 컬트이다. 말이 안 되는 것 자체가 이 컬트의 정체성이다. 그것을 즐길 수 없다면 당신은 이미 시대에 뒤진 지나치게 고루한 보수주의자일뿐이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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