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안 만나고 싶어요." 어느 날 박정자가 나한테 파격적인 말을 했다. '만나고 싶지 않으면 관두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것이 그녀의 매력이다. 왜 나한테 화가 났을까? 그 이유를 생각하니까 자기 연극에 간다고 약속해 놓고 가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연극을 가능하면 가는 편인데 그 날은 급한 일이 생겨서 가질 못 했다. '정말로 삐쳤나'하는 걱정에 얼굴을 살짝 들여다보니까 히죽 웃고 있었다.
1942년생이다. 공식 데뷔는 1962년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한 3년 먼저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따라서 박정자는 금년에 배우 인생 50년을 맞이하는 셈이다. 연기생활 몇 년, 가수생활 몇 년 하는 이벤트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나 박정자는 그런 걸 한번 해 봤으면 한다. 어느 날 운명처럼 찾아온 연기를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 들였지만, 무슨 매력이 있기에 50년을 오직 연기의 길 하나에만 매달리며 살 수 있을까? 박정자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
■ '사람 냄새가 짙은 박정자'
배우로서 보다 인간 박정자의 모습을 나는 더 좋아한다. 나뿐만 아니라 그녀를 아는 많은 사람들도 동감일 것이다. 그녀의 분신처럼 함께 다니는 딸도 그런 생각일 것이고 그녀의 남편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다시는 안 만나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것도 매우 박정자 스럽다.
그녀는 아주 솔직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솔직하다 보면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가 있는데 그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또한 그녀는 약속을 잘 지킨다. 연극공연이나 연습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 일단 약속한 것은 철저하게 지킨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사모가 생길 법도 한데 그녀의 팬클럽은 '꽃봉지'라고 한다. 역사도 오래 되었고 회원도 아주 많다. 그리고 행사 때 보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이것이 그녀의 행복이다.
■ '타고난 배우이면서 노력하는 연기자'
자기가 하는 일에 욕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만은 그녀는 작품에 대한 애착이 많다. '위기의 여자',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 했다', '신의 아그네스', '에쿠우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등 수많은 작품들이 그녀에 의해 해석된 것들이지만 '19 그리고 80'이란 작품에 대한 애착은 끔찍하다.
해롤드 라는 19살 된 청년과 모드 라는 80살 된 여인 사이에서 사랑이 생기는 이야기가 줄거리인데 그 속에는 페이소스가 있고, 특이한 애정이 있고, 아기자기함이 있다. 이 연극을 박정자가 모드 역을 맡아 이끌어 가고 있다.
"나는 내 나이가 실제로 80살이 될 때까지 이 작품을 매년 하고 싶다"고 말 했다. '19 그리고 80'이 국내에서 초연 된 것이 2003년이고, 그녀가 80살이 되려면 2021년이 돼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1년에 한번 씩 무대에 올린다고 했을 때, 총 19회가 된다. 그리고 그녀의 파트너가 되는 젊은 연기자는 매년 바뀌기 때문에 그녀는 19명의 청년과 사랑을 하고 키스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박정자가 80살이 넘었다고 이 연극을 마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90이 되어도, 100살이 되어도 그녀는 이 연극을 하고 말 것이다. 또는 다른 연극과 겹칠 경우 2년에 한번으로 변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배우가 자기의 대표 레퍼토리를 분명하게 정하고 나이 들 때까지 지킨다는 것은 어느 나라고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이것이 그녀의 또 하나의 행복이다.
■ '무대 위에서의 매력 포인트'
박정자 연극을 보면서 조는 사람은 없다. 카리스마 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졸 수가 없다. 보통 때 그녀는 조용조용하게 말을 하는데 무대에만 올라가면 어디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그녀는 대사전달의 마술사다. 한마디, 한마디 놓칠 수가 없을 만큼 대사전달(Diction)이 정확하다.
얼굴표정은 또 어떤가.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에서 그녀의 얼굴표정은 카멜레온이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 연기를 아주 좋아한다. 무슨 작품이든 간에 그녀의 손과 손가락을 눈여겨보기를 권한다.
남과 대화를 할 때라든가, 혼자 무슨 생각을 할 때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그것이 일부러 만든 것인지, 자연스럽게 나오는 습관인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아주 재미가 있다. (실례의 말이 아니라면) 귀엽기도 하다.
■ '영화배우 박정자'
놀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박정자가 영화에도 출연을 했나? 사실이다. 주연급으로 출연한 영화로서'자녀목'이 있고 그 외에도, '육체의 약속', '아낌없이 주련다', '말미잘', '과부춤' 등 많은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을 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박상호 영화감독은 그녀의 친 오빠이면서 스승이었다. 연기에 대한 자부심을 강하게 심어준 사람이 박 감독이라는 얘기를 그녀는 늘상 하곤 했다.
그녀는 정말 노래를 잘 한다. 무슨 노래든지 그녀에게 가면 영락없이 박정자 스타일로 변하는데, 어지간한 가수들은 기가 죽을 정도로 노래를 잘 부른다. 또한 진지하게 부른다. 노래하는 것도 연기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연극을 구경한 후에 커튼콜 시간에 '박정자씨, 노래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면 대체로 노래 한 곡을 하기도 하는데 모두 놀란다. 심지어 가수활동을 권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녀 자신도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최근에 그녀는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2005년 '연극인복지재단'을 창립해서 초대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연극인들 중에 불우한 이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자 기금 모금을 하고 있다. 이렇듯 조용하면서도 강한 면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발걸음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다. 행복한 모습의 박정자가 부럽기 짝이 없다.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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