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사진작가 김용호씨가 2003년 낸 사진집 <한국문화예술명인> 에 포착된 그는 역시 독특했다. 널찍한 판형에 고감도 흑백 영상으로 포착된 그의 모습에는 귀기(鬼氣)가 넘친다. 한국문화예술명인>
거장스러운 품격에, 거장다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일순간에 무너뜨리려 작정이라도 한 표정이었다. 제멋대로인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와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질의 팔…. 뭇 남자들이 기가 죽을 판이다. 장충동 작업실에서 만난 무대 뒤의 막노동자, 이병복(82)씨는 여전하다.
1966년 탄생한 극단 자유는 2006년 그가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자 해체됐다. 무려 40년 동안 극단 대표로 자리를 지키며 온갖 풍상을 막아낸 그는 "평생 연극 뒷바라지만 해 세상일은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 한 마디 던지고 곧장 하던 작업으로 돌아갈 태세다. 인터뷰 대상자로서는 문제적 개인이지만, 묘한 영기가 사람을 잡아 끈다. 때로는 넋두리하듯, 때로는 지청구하듯 그는 정밀한 기억력으로 지난 시간을 반추해 냈다.
반 세기 연극 활동을 돌이켜 보니 반성할 점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매너리즘에 빠져 도약의 기회 놓친 것"이라는 답이 곧 돌아왔다. 그러나 매 작품이 전투였다. 그는 프랑스 이야기가 나오면 불어를, 이야기에 신이 나면 고향인 경상도(영천) 사투리를 서슴없이 썼다.
- 요즘 작업은 어떻게 하나.
"나는 일년 내내 맹글어야 하는 전천후 노무자다. 남편(화가 권옥연ㆍ85)과 세운 '무의자 박물관'에 나가 살다시피 하며 거의 매일, 아침에 가서 오후 내내 일한다. 맨날 (탈을) 주무른다. 부쉈다 다시 만든다. 나는 한지가 좋다. 한지 작업 아니면 연극 현장이다. 거기 안 갈 때는 여기서 연극의 뒷일을 한다. 종이 주무르고 탈 만들지만, 젖 한 모금도 못 얻어 먹는 일이다."
- '무의자'는 무슨 말인가.
"'벌거벗은 아들(無衣子)'이란 뜻인데, 사실 굉장히 건방진, 철학적 얘기다."
- 왜 한지를 고집하나.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생명을 지닌 한지에는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귀신 붙은 것 같이, 거기서는 오만 이야기가 다 나온다."
- 어떻게 한지를 발견하게 됐나.
"극단 자유의 창단작 '따라지의 향연' 공연 때 배우가 70여 차례나 옷을 바꿔 입어야 했는데,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한지에 덤볐다. 혼이 나도록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다 한지 작업을 본격화한 것은 1988년 민비를 그린 '수탉이 안 울면 암탉이라도'부터다."
- 한지가 그렇게 매력 있나.
"한지에는 정신이 있다. 귀신이 붙은 것처럼…. 거기서 오만 얘기가 다 나온다.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생명력 또한 매력이다."
- 창단 40주년 때 극단이 해산한 이유는.
"실은 80살 때 연극 그만 두고 남양주로 간다 했는데, 질질 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거죽으로 보면 모가 나 있지만, 나는 사실 속은 물러터진 사람이다. 단원들은 1년만이라도 더 해 달라고 했으나, 내 일 하겠다고 거절한 것이다."
- 어떻게 만든 극단인가.
"해방 전 전문학교 다니다 이후 이대 영문과에서 '여인소극장'이란 극단을 만들어 2년 반 동안 배우ㆍ스태프로 뛰던 중 전쟁이 터졌다. 부산으로 피난 갔다 결혼한 뒤, 아이 둘은 시어머니께 맡기고 남편과 4년 동안 프랑스 유학을 했다.
나는 소르본대, 남편은 조각연구소에서 1957~61년에 있었다. 당시 프랑스 친구들과 여전히 교류하는데, 장님 된 친구도, 원로 언론인 된 친구도 있다.
1962년 귀국하고 보니 전 재산이라고 달랑 20불이었다. 아이들 먹이려 가위 들고 정신없이 재봉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 '내가 이게 뭐야. 연극할 년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연극) 동지 찾아보니 전쟁통에 뿔뿔이 흩어져버려 고민하던 중에 연출가 김정옥씨를 만났다. 파리의 연극인 장루이 바로 부부가 했던 것처럼 우리도 둘이서 만들어보자 합의했다."
- 왜 '자유'인가.
"기성의 스타일에 구속받지 않는 진보적 연극으로, 관객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무대를 집단창조 방식으로 만들어 낸다는 목표였다. 1978년 장승 민담을 근거로 김정옥씨가 구성ㆍ연출한 '무엇이 될꼬 하니'에서 집단창작 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하면서 진짜 자유의 색깔을 냈다. 자유와 파격의 무대에 국내 연극계가 많이 놀랐다."
- 당신이 생각하기에 대표작은.
"'노을을 나르는 새들'이다. 무대를 모두 종이로 만든, 나의 혁명작이다. 남자에게는 한국의 독, 여자에게는 항아리 모습을 한 의상을 입혔다. 또 일상적 치마 저고리 아닌 모습의 옷을 입은, 사람의 형상을 한 종이인형을 특별한 이름이나 의미 부여 없이 무대에 주렁주렁 달아 놓는 시도도 했다.
특히 유럽에서 호응을 받았는데 그 사람들?우리가 고대 그리스 연극의 코러스를 따라한 것으로 이해하더라. 그러나 그런 것과는 절대 무관한, 나의 생각에 의한 무대다. '수탉이 안 울면 암탉이라도'에서 처음 썼던 종이옷의 매력을 발산한 작품이었다."
- 연출 작업을 거의 도맡다시피 한 김정옥씨는.
"우리 둘은 물과 불이다. 그는 대단히 논리적이어서 감각적인 것은 볼 줄 모른다. 그럼에도 그렇게 오래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이 끝나면 그간의 미학적 대립은 모두 없던 일로 되기 때문이다.
기획적 능력이 뛰어난데다 작품에서 성실하니 딴 말이 필요 없다. 당시 연극에 미친 사람들은 참으로 순수했다. 요새처럼 실리적으로 변한 연극판이었다면 우리 두 사람 같은 관계는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 요즘 연극판을 어떻게 보나.
"완전 뮤지컬판 아닌가. 한국은 일본처럼 연극과 함께 신파, 가부키가 공존하는 데가 아니다. 한국은 유니폼 민족이다. 뭐 하나가 잘 되면 너도나도 똥파리처럼 붙어 간다. (내가) 한국적 뮤지컬을 개척했어야 했다."
- 한국적 뮤지컬이란.
"본능적으로, 브로드웨이식 뮤지컬은 싫었다. 우리가 했던 '따라지의 향연' '피의 결혼식' 같은 외국 작품이 해외에서 성공한 것은 한국적 각색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 머무르지 않고 판소리, 마당놀이 같은 자산을 이용해 우리 뮤지컬 개발을 시도했어야 하는데 나이만 먹었다. 어디 내놔도 외국인들은 흉내 못 내는 우리의 정체성이 있어야 세계 시장에서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남양주 한옥마을에서 왕자 호동을 주인공으로 한 '둥둥 낙랑둥'을 끝낸 뒤부터 꿔 온 꿈이다. 김덕수 사물놀이와 새 음악을 찾고 있던 피아니스트 임동창씨가 흔쾌히 합류, 소설가 최인훈씨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상연할 때 음악을 맡았다.
명동극장서 초연 당시는 파리만 날렸는데, 한 연극상을 타고 나자 미어터지더라. 공연 마지막 날, 결국 쓰러졌다. 하도 커피를 마셔대 위에 구멍이 뚫렸다더라. 지금 나는 돈도 시간도 없고 몸은 늙었다. 너무나 아쉽다."
- '옷굿' 무대가 그에 대한 답이었나.
"진오귀굿 하듯, 내 새끼들(옷) 좋은 데 보내려고 펼친 굿 무대였다. 그간 대표적 무대에 등장한 종이옷 40여 벌을 배우들이 입고 마임 연기를 펼치다, 옷을 잘 개서 저승길로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종이로 만든 상복 입고 진혼식을 펼치는 코러스는 거의 나체였다. 정말 내 예술의 매듭을 짓는 느낌이었다. 무대 옷은 내 자식이다. 내가 손수 만든 내 자식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극단 자유의 불문율이기도 했다."
- 40년 간의 작품들을 모아 펼쳤던 2006년의 '없다' 전시회 뒤에는 옷을 태워버렸지 않은가.
"거의 반은 태웠다. 일꾼들 데리고 '쓰레기 태우듯, 망자의 옷을 불사르듯' 태웠다. 현실적으로는 작품들을 모아 후학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그랬다. 한국에 미술관, 박물관은 숱하게 있는데 연극쟁이만 박물관이 없는 거라. 공산권과 수교가 이뤄져 체코, 폴란드에서 열렸던 세계무대미술협회 총회에 갔던 적이 있다.
볼펜 한 자루 살 데도 없던 그 가난한 곳에, 폭격 맞아 폐허 된 건물을 복구해 연극박물관으로 전용한 것을 보니 눈물이 펑펑 나더라. 그렇게 세월 흘렀는데, 한국에는 연극만 박물관이 없다. 연극인들이 제일 못났구나, 능력 없구나 싶다.
연극배우 출신 장관이 둘이나 나왔는데도…. 핸드폰 쓰는 것은 세계 1등일지 모른다. 뼈대부터 선진국이 돼야지. (지금 우리는) 벼락부자가 멀쩡한 이 뽑아 금이빨 한 형국이다. 선진국이니 뭐니 그런 얘기 함부로 하지 말자."
- 강의 요청도 있었을 텐데.
"물리쳤다. 나는 아무도 없는 데서 혼자 일하는 게 제일 좋아. 그렇게 사람 싫어하는데도 연극 집단에만 가면 신난다."
● 나의 꿈, 나의 연극박물관
이병복씨의 꿈은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고택 연극박물관 단지'에 있다. 그는 "저놈의 금곡에 죽기 전에 설거지라도 옳게 해야 되겠다고 연극 때려치웠는데 돈이 없으니 기가 차다"고 했다. "(금곡 일 하느라) 독수리 발톱 다 됐다"며 거친 손을 펴 보였다.
전국에서 비슷하게 생긴 고택을 8채 사서 해체ㆍ복원, 박물관 인가까지 받아둔 터다. 그러나 제대로 손을 못 보다 보니, 지금은 비조차 긋지 못한다. 그는 "나는 지금 한계점"이라며 몇 백년 버틴 고택들이 자기 탓에 주저앉을까 노심초사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믿음으로 1960년대 후반 아파트를 팔아 산 '궁(宮)집'이 그 시초였다. 궁집은 조선 영조가 못 사는 지아비를 만난 막내딸 화길옹주에게 지어준 집이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고급 요정 등이 궁집의 입찰 경쟁자로 나섰으나 앞으로 박물관을 하겠다는 이씨의 팔이 올라간 것이다. 이후 금곡 땅으로 모인 정통 한옥들은 다도 강습, 시낭송, 공연 등의 목적에 맞게 배치돼 있는 상태다.
1979년 이후 극단 자유의 해외 공연을 계기로 세계 문화인들에게 본격 소개되기 시작한 일종의 '소규모 고택 단지'다. ITI(국제연극협회) 총회 등 국제 회의를 그곳에서 개최하자, 외국인들은 "한국의 숨은 보석"이라며 감탄했다.
88올림픽 전에는 국제 무대에서 존재감도 없던 한국이 국제 무대예술계에서 주목을 끈 데는 분명 고택의 역할이 컸다는 문화계의 평이 따랐다. 그러나 이제는 주무 부서도 바뀌는 바람에 그의 마음은 애물단지가 된 자식 보듯 아리다. "정부에서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남편인 중진 화가 권옥연씨는 비판적인 동지다. 이 커플은 되도록 접점을 없애려 한다. 눈 뜨면 권씨는 2층 아틀리에, 그는 잡동사니 가득 찬 4층 작업실에 틀어박힌다.
서로의 작품에 대해 피차 가혹한 비판자임을 아는 터라, 아예 못 오게 한다는 것이다. 그림을 팔아 금곡을 조성해놓고 관리는 나 몰라라 하는 남편을 두고 그는 "숫제 웬수"라고 했다. 인터뷰 당일, 남편은 일찌감치 밖에 나가고 없었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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