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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1> 의리의 사나이-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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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1> 의리의 사나이-이문열

입력
2009.03.1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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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생활 40년이 넘으면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도 참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모두에게 느끼는 고마움이란 일일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 중 한 명이 작가 이문열이다.

그와 맺은 인연이 종교적이었다는데서 좀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때나 한 번씩 동네 교회에 들렀던 나를 기독교에 입문하게 했으니 말이다. 우리 집은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람의 아들> 을 연구하기 위해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 길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다.

내가 첫 감독 작품을 준비하던 중 그의 <익명의 섬> 을 읽게 되었다. 그 작품은 <사람의 아들> 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내가 그를 직접 만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다. 서로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었다. 불행히도 <익명의 섬> 은 이미 다른 영화사에 판권이 양도되어 있었다.

판권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독특할 뿐만 아니라 매우 깊었다. 현실 문제도 피하려 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처한 정치적, 구조적 문제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서슬이 퍼런 칼을 막무가내로 휘두르고 있을 때 그는 도전장을 내밀 듯 작품 하나를 발표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었다. 다시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 작품 역시 벌써 한 예비감독에게 영화 판권을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유명한 감독이나 제작사도 아닌 예비감독에게 저작권을 넘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계약서도, 계약금도 없이 단지 구두 약속만으로 말이다. 한 감독지망생이 책을 읽고 찾아와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설명하는데 설정한 방향이 너무 훌륭하여 “만들어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그 작품을 놓친 아쉬움보다 그의 열린 태도에 더 감탄하였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은 한국 영화계에 한 유능한 신인 감독을 탄생시켰다. 그가‘박종원 감독’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생인 박종원은 이 작품으로 그 해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며 혜성같이 등장한다.

그는 이어 박종원 감독에게 <구로 아리랑> 을 주어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다질 수 있게 하였다. 나는 그의 작품을 만들 기회가 없었으나 그에 대한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신작 <시인> 을 읽었다. ‘김삿갓’ 이야기였다. 그는 그 동안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이천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부악문원’이라는 서원을 만들었는데 뒷산 부아악(負兒岳)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했다. 나는 그곳에서 그의 부인‘박필순 여사’가 만들었다는 막걸리를 마시며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오후까지 박 여사가 깔아준 침상에서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저녁대접까지 잘 받고 돌아왔다. 마치 그의 작품 <시인> 의 ‘김삿갓’이 된 기분이었다. 그 날 그는 집을 나서는 나에게 <시인> 의 영화저작권을 주었다. 그 동안 못 다한 인연을 맺자며 백지에 몇 글자 적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저작권료는 ‘100만원’. 그의 영화저작권은 통상적으로 1억원을 상회하던 시기였다. <시인> . 작중 주인공인 ‘김삿갓’에 그가 있었다. 나는 그 작품을 준비하는데 수많은 노력과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제작 준비가 순조롭지 않았다. 어느 날,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준비가 잘 되가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여건이 좋지 않아 일이 자꾸 지연된다고 말했다.

이미 저작권 시효기간인 5년이 지난 때였다. 내가 기간이 너무 오래 걸려 미안하다고 하자 그는 계속 추진할 의사는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어려움이 있지만 꼭 해보고 싶다고 하면서 혹시 잘 할 사람이 있으면 내가 양보하겠다고 하였다.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꼭 만들고 싶으면 만들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영화계에서 소문이 돌았다. 한국의 대표감독 L씨와 대표제작자 L씨가 <시인> 의 저작권 시효가 지난 것을 알고 이문열씨에게 거액의 저작권료를 들고 찾아갔는데 “하 감독이 하겠다고 하니 죄송합니다”며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유명세가 있는 작가들 중 상당수가 저작권 기일 하루가 넘기 무섭게 작품을 다른 곳으로 넘기는 풍토에서 그의 일화가 한 순간에 충무로를 놀라게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하 감독님께 드린 거 아닙니까.” 주었으니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의 <명성황후> 가 뮤지컬로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 작품을 영화화하자고 하였다. 연극 연출가 윤호진씨가 반대하고 나섰다. 공연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들어주었다. 영화가 만榕沮嗤?시너지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그에게 희곡을 썼으니 이번에는 시나리오를 써보자고 하였다. 그는 전혀 다른 세계라며 주저하였다. 나는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가 결심을 하고 집필에 들어갔다. 그 곁에 내가 있었다. 부인 박 여사가 자수를 놓으며 같이 밤을 새웠다. 밤새도록 남편 곁에서 수발을 하였다. 때로는 그녀가 졸다가 바늘귀를 헛 찔러 잠을 깨는 모습도 보았다. 나는 이문열 작가의 글들이 어떻게 쓰여지는가를 보며 가슴이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탈고를 하였다. 그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공개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시나리오는 매우 훌륭했다. 나는 그가 한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한 시나리오 작가로 탄생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였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공개하지 않고 초고 시나리오에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와 생활하는 동안 그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북한으로 달려가는 모습도 보았다.

빨갱이의 자식이라며 연좌제에 걸려 몹시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가 무서운 독재와 겁 없이 싸우고, 정치판과 싸우고, 그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그의 저서들을 그의 집 앞에서 불태우는 야만과 싸우는 모습도 보았다.

그에게는 태생적 투사의 용기가 있다.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는 작가, 약자와 정의의 편에 선 작가, 이문열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그의 수많은 저서에서 나는 사랑을 얻었다. 나는 그가 인간을 탐구하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미래를 향해 달려가게 하는 위대한 작가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의 끊임없는 에너지가 우리사회에 원동력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비록 그의 두 편의 작품을 영화로 완성 못 하고 있지만 언젠가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아름다운 조선의 <시인 김삿갓> 과 아름다운 조선의 여인 <민자영-명성황후> 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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