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말 발표된 건설ㆍ조선업계 1차 구조조정 결과는 숱한 뒷말과 부작용을 남겼다. 채권단으로부터 그나마 '괜찮다'는 평가(BㆍC등급)를 받은 업체 3곳이 얼마 안 돼 스스로 법원에 회생절차(옛 법정관리)를 신청했을 정도다. 기계적인 잣대로 생사를 가르고, 스스로 부실 부메랑을 맞을까 두려워 한 은행들이 적극적인 판단을 꺼리면서 '살만한 기업은 죽이고, 얼마 못 갈 기업은 살려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가 적지않다.
이번 주부터 본격화될 구조조정은 훨씬 덩치(대기업그룹)도 크고, 대상(신용공여액 50억원 이상 기업)도 많다. 확고한 원칙과 정밀한 진단이 수반되지 않으면 자칫 엄청난 혼란만 키울 우려도 높은 상황이다.
대기업ㆍ해운업 줄줄이 대기
채권은행들은 지난주 44개 대기업그룹에 외부감사인의 감사를 받은 2008 회계연도 결산 재무제표 등의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은행들은 크게 부채비율과 이자보상배율, 총자산회전율, 매출액영업이익률 등 4가지를 중점 평가할 계획. 특히 최근 경기하강 속도에 비춰 부채비율이 주요 잣대로 떠오르면서 부채비율에 따라 합격판정을 받을 수 있는 종합점수 기준이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채권단 관계자는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 자산 매각이나 계열사 정리 등 강도 높은 자구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권단이 지난해 9월말 기준 재무제표를 기준으로 올 2월 약식 평가를 한 결과, 5~6개 그룹이 불합격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난해 4분기부터 급속도로 악화된 경기를 감안하면 앞으로 개선 대상에 포함될 그룹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해운업 평가작업은 4월에 본격화된다. 평가 결과, B등급(일시적 자금 부족 기업)에는 자금이 지원되지만 C등급(부실 징후기업)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D등급(부실기업)은 퇴출된다. 특히, 용선(빌린 배) 비중과 미지급금 규모, 선박의 가압류 등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채권단 관계자는 "종합점수 60점 미만을 받은 해운사는 워크아웃, 45점 미만은 D등급을 받게 된다"며 "용선이나 대선(빌려준 배) 비중이 높고 재무구조가 나쁜 업체는 퇴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채권단은 사실상 정상적인 영업을 못하는 하위 10~20개사가 인수ㆍ합병(M&A) 등 강제 구조조정 대상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부 역할이 중요"
여전히 채권은행들에게 주도권이 맡겨져 있는 구조조정 구도는 그만큼 뚜렷한 한계를 예고하고 있다. 은행들이 스스로의 거래기업을 부실로 판정할 배짱이 있는 지 의심스러운데다 건설ㆍ조선사와는 차원이 다른 대기업들의 로비도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등 재계 이익단체들은 "대기업 대출도 만기연장해 달라" "자율적 구조조정이 중요하다" 등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부 일각에서는 기업 부실이 표면화되지 않고 잠재된 상황에서 기업 구조조정을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면 실업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한양대 하준경 교수는 "시장에서는 정부가 확실한 구조조정을 하자는 건지, 어떻게든 각 업종의 거품을 유지하며 넘어가보자는 건지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하다"며 "정부가 향후 경쟁력 있는 산업 재편을 포함한 큰 그림을 제시하고 채권단 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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