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1970년대 들어 백인들이 대도시를 떠나는 이른바 대량탈출 (massive exodus)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동네에 흑인이 한 가족만 이사해 와도 순식간에 동네 전체가 까맣게 변하면서 집값은 떨어지고, 동네는 그만 할렘으로 바뀐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래서 백인 동네들은 흑인들이 이사해 들어오지 못하게 별의별 방법을 동원했다.
흑인가족을 이웃으로 두는 게 싫어서 라기 보다는 부동산 가격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백인 동네에 흑인이 걸어 다니면 순찰 중인 백인 경찰이 "어디 사느냐, 이 곳은 왜 서성거리느냐"고 물으며 귀찮게 했다.
심한 경우에는 이들을 일단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쓸데없는 조사를 한 뒤 풀어주곤 했다. 한마디로 다시는 백인동네 근처에서 서성거리지 말라는 강한 메시지였다. 이런 방법으로 백인들은 자기들의 동네를 흑인으로부터 결사적으로 지켰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돈 있는 백인들은 흑인들이 몰려 올 것 같은 기미만 보이면 얼른 헐값에라도 집을 팔고 교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큰 도시들은 흑인들 차지가 되기 시작했고, 집값은 곤두박질했다. 교외로 이사한 중산층 백인들을 위해 크고 장거리 운행에 편안하면서 사고에도 비교적 안전한 이른바 스테이션왜건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유명 백화점들도 교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넓고 아름다운 미국의 신도시들이 이 때 생겨났다.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는 그 대표적인 예다. 한때 아름다운 전통을 자랑했던 LA 도심도 1970년도에는 엉망이 됐다. 시내 큰 길은 주말이면 완전히 멕시코 도시로 바뀌었다. 가게마다 히스패닉들의 노래가 크게 울려 나오고, 모두들 히스패닉 말로 떠들어 대며, 길거리는 멕시칸 음식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마디로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모르게 변했다. 행인들도 주로 멕시칸 아니면 흑인들이어서 가끔 보이는 백인들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곳곳에 넘치는 노숙자 (Homeless) 들이 컵을 들고 행인들을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거나 신호대기 중인 자동차로 다가와 원하지 않는데도 차 유리창을 닦고는 돈을 요구하는 불쾌한 곳이 돼 버렸다. 그리고는 월요일 아침이면 다시 제자리를 찾아 백인들로 꽉 찬 전형적인 미국의 대도시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곳의 백인들 역시 빠른 속도로 교외 (오렌지 카운티, 산퍼난도 밸리)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아름답던 LA는 점점 절망적인 도시로 바뀌었다.
저 유명한 윌셔 거리는 더 이상 번성을 멈췄고, 한때 유명 배우들이 모여 살던 아름다운 옛 유럽 스타일의 집들은 흑인과 히스패닉, 아시아계들에게 싼값에 넘어갔다.
LA시내에서도 가장 사치스러우면서 오랜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빌트모어 (Biltmore) 호텔도 일본 사람들 손에 넘어가고, 할리우드도 쇠퇴하면서 차차 주말에 가족들이 갈 곳이 없어졌다.
그래서 미 연방 의회는 소위 지역 재개발청 (Community Redevelopment Agency) 을 설립했다. 재개발청의 임무는 다운타운을 재생시키는 일이었다. 다운타운에 재개발 구역을 정해놓고 전체를 면세 지역으로 지정해 중산층을 다시 도시로 끌어들이자는 것이었다.
소위 말하는 Tax Increment Money (세금과 부동산 가격 차이)의 재투자가 이때 생겼다. 이 프로그램에 의해 가장 성공을 구가한 곳도 역시 LA 다운타운이었다.
한국은 인구가 온통 서울에 집중돼 인구의 거의 절반이 서울과 그 근방에 몰려있고, 경제력도 거의 80%가 서울에 집중돼 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너도나도 서울로 몰리는 바람에 지방 인구는 줄고 지방 학교들은 문을 닫고, 농촌은 급격히 쇠퇴하고 지방에선 젊은 배우자들을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등 미국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정부에서 신도시를 서울 외곽에 마련하고 정부청사를 옮겨도 인구이동은 전혀 없어 보인다. 차라리 KTX를 타고 출퇴근을 하지 서울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 학군도 그렇고 병원도, 또 문화생활에도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이유다.
미국의 고민은 서울과는 정반대로, 교외로 빠져나간 중산층 가족들을 다시 대도시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LA는 이를 위해 연방 의회의 Tax Increment Money를 갖고 '보나벤처'라는 유명한 호텔을 지었고, 이를 중심으로 새로 생겨난 고층건물 구역이 LA 다운타운과 연결되면서 LA 의 모습이 확 바뀌었다.
정부의 청사진을 따라 도심에 고층 콘도미니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 안에 수영장, 테니스장을 만들어 도시생활을 도시 안에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차차 자동차로 출퇴근하는데 지친 젊은 부부들이 모여들면서 LA 중심가는 이전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넓은 공간에 끝없어 보이는 잔디밭과, 울창한 나무들로 잘 조화된 주택가들과, 좋은 학군들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예상대로 대도시 LA 다운타운을 옛모습으로 바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연방 정부가 돈을 퍼부어도 이미 행복한 가족의 둥지를 만든 이들을 도시의 고층건물로 불러들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대도시는 낮에는 그 곳에서 일하지만, 저녁에는 20~30마일 떨어진 널찍한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직장인들의 일터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중산층은 비록 평일에는 교통혼잡과 싸우며 피곤하게 살더라도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곳곳에 있는 아름다운 공원과 넓은 쇼핑센터를 즐기는 교외생활 방식에 만족해 하고 있다.
일하는 젊은 부부들이 다시 도심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에너지 비용 상승과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는 교통혼잡 때문이다. 거의 30년만에 백인들이 차츰 다시 돌아오면서 대도시의 생활패턴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러 인종이 함께 모여 비비고 사는 대도시의 복잡한 생활에 미국인들이 적응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아시아계, 특히 한국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거의 사라졌고 한국인들의 미국 내 입지는 무척 향상됐다.
게다가 한국산 우수 상품들이 몰려 들어오면서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때문에 한인 동포들의 위상이 높아진 이 때에 더 많은 동포들의 정치입문이 기대된다.
누가 아나. 머지않아 한국계 부통령이 나오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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