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치미를 떼다'에 나오는 시치미는 원래 주인 주소를 적어서 매에게 묶어주는 명찰이다. 잘 훈련된 매가 사냥보조역으로 쓰이던 시절, 귀한 매를 잃지 않기 위해 생겨났다. 매를 가로챈 이들이 시치미를 떼고서는 제 매로 삼는 경우가 있어서 나쁜 짓을 하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 나왔다.
하위직이 빼돌린 국가예산
가난한 이들에게 가야 할 돈을 제 돈처럼 쓰고 시치미를 뗀 공무원들이 줄줄이 드러났다. 지난 달에 서울 양천구청의 7급 공무원이 26억여원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난 것을 계기로 조사해보니 또다른 양천구청 7급 공무원이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가야 할 1억6천만원을 가져갔고, 용산구청의 8급 공무원은 장애인에게 돌아갈 보조금 1억6천만원을 챙겼다. 10일에는 전남 해남군청의 7급 공무원이 기초수급자에게 가야할 생계비와 주거비 10억여원을 횡령한 것이 드러났다.
감사원이 전라남도 22개 시ㆍ군과 서울시 31개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복지급여 집행실태를 점검한 결과 드러난 것이니 전국을 대상으로, 복지급여가 아닌 모든 예산 집행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다면 얼마나 더 나올지 알 수 없다. 오죽하면 공금 6천만원으로 아파트 대금을 치른 충남 아산의 공무원이나 안마시술소로부터 뒷돈을 받은 경찰의 죄가 덜해보일까.
고위직들의 수뢰가 정책 결정을 이롭게 해준다는 전제로 외부로부터 받는 것이라면 하급 공무원들의 착복은 국가예산을 직접 빼돌린다는 점이 다르다.국가로 들어와야 할 세금을 봐주고 뇌물을 받는 세무공무원들의 사례도 있다.
국가로 들어와야 할 돈이든 국가에서 나가는 돈이든 돈을 다루고 있는한 하위직에게도 부정의 소지는 언제나 있다. 그런데 현행 공직자윤리법은 하위직의 부정축재를 감시하는데 약하다. 양천구청의 엄청난 부정이 밝혀진 뒤끝이라 감사원이 나섰지만 실상 감사원은 중앙정부의 고위 공무원조차도 개별적인 부정을 감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문제가 된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우, 지방의회가 감시역할을 해주는 것이 맞겠지만 지방의회가 지역 이권에 더 개입하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에는 현재 4급 이상의 고위공무원만 하도록 되어 있는 재산등록제도를 하위직까지 포함시키는 방안을 생각해볼 만하다. 특히 돈을 직접 관리하는 국세청과 중앙부처, 지방자치단체의 개별 책임자의 자리는 재산등록이 필요하다.
양천구 공무원은 2005~2008년 사이에 26억원을 가족의 계좌로 빼돌렸고 해남 공무원도 2002년~2007년에 남편과 자녀, 지인의 차명계좌로 10억원을 빼돌리고 가족 명의로 건물과 땅을 4000평 이상 사들였다. 이들의 재산변동이 매년 보고됐다면 이듬해에 부정은 잡혔을 것이다. 아니 재산등록을 해야 한다면 이들이 감히 이렇게 부정한 짓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이 놀랍게 여겨진 것은 그동안 공무원 비리의 주범으로 지적받던 경찰 교육부 법무부 검찰청 국세청(법무부 2008년 국정감사 자료) 공무원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외부서'라 여겼던 복지 영역에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이래 복지예산은 늘어났으나 감시체계는 갖춰지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빈부격차를 고민하는 현 정부에서도 이것은 여전한 문제이고 '녹색 성장'을 외치는만큼 환경부서에서 문제가 터질 가능성도 크다. 작년에는 선관위의 9급 기능직이 2억여원의 돈을 횡령한 것이 감사원 조사로 밝혀졌으니 부정은 직급과 부처를 가리지 않는다.
예산 다룬다면 재산등록해야
그런 점에서 돈을 다루는 공무원은 직급을 막론하고 재산등록을 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오로지 월급만을 받고 성실하게 일하는 공무원들의 명예를 지키고 이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하위직 공무원의 부정을 감시할 방안은 구체적으로 나와야겠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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