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은 살아나는 것 같은데 리치 마켓(부유층 금융상품)은 다시 박살나겠군. 골치 아파지는데. 이렇게까지 되나…알았어.”
미국 뉴욕 맨해튼 49번가와 50번가 사이에 위치한 메릴린치 본사 24층 자산관리팀. 증시가 막 개장한 9일 오전 10시(현지시간) 수석 자산관리 매니저가 전화통을 잡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커머셜(상업용 빌딩) 부실이 더 커지는 것 아닌가. 심각하군. ‘지금 주식 사서 1, 2년 갖고 있으면 오르겠지’ 하는 기대마저 완전히 날려버리겠다는 것이겠지.”
이어 열린 전체 팀 오전회의. 증시 바닥이 어디인가를 놓고 논쟁이 오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수 5,000까지 갈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어. 지수 1만이 깨졌을 때, 지수가 8,000이 됐을 때도 ‘최악은 지났다’는 말이 나왔잖아. 부실이 얼마나 더 있는지도 모르겠고.” “팔지 못한 부실채권이 경매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예상 가격의 50% 선에 낙찰된다고 하네요.” “요즘 베스트 바이(전자제품 전문 매장)에는 컴퓨터, TV 재고가 없습니다. 수요가 없다 보니 생산을 줄인 것인데, 나쁘지 않은 신호입니다. 점차 공급을 늘릴 수 있다는 얘기니까.”
수석 매니저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린 에너지다, 줄기세포다 하는데 거기서 거품을 일으켜 단기적으로나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팀장과 팀원이 쏟아내는 발언은 속사포였다. 어려운 전문 용어도 많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긴박했다.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회의 분위기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한 팀원이 말했듯 그나마 바닥 논쟁을 꺼낼 수 있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었다. 몇 달 전, 아니 몇 주전만 해도 증시 바닥을 얘기하는 것은 무모한 사치였다.
지난해 9월 리먼 브러더스가 무너지면서 본격화한 뉴욕발 금융위기가 6개월이 됐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맨해튼은 그때보다 더 흉흉했다. 관광객이 여전해 겉으로는 달라진 게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급한 심정을 토로했다.
뉴욕 32번가에서 10달러 내외의 음식을 파는 한국 음식점의 총괄 매니저 이모(37)씨는 “매상을 올려주던 월가 사람이 급격히 감소해 타격을 받고 있다”며 “손님을 끌기 위해 가격을 후려치는 음식점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모두가 죽을 뿐 아니라 한국 음식을 싸구려로 전락시킬 수 있다”고 걱정했다. 뉴욕 우리아메리카은행의 이병웅 본부장은 “임차인의 폐업, 부도가 속출하고 빌딩 공실률이 높아지고 있다”며 “임대업자들이 임차인 찾기가 점점 어려워져 임차기간을 가급적 길게 잡으려 한다”고 말했다.
톰슨 로이터 그룹의 재클린 포 선임기자는 대출시장의 불확실성을 설명하면서도 ‘월가 책임론’은 완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모럴 해저드는 과거에도 있었다. 위기의 원인을 월가의 관행에서만 찾는 것은 독자를 호도하는 것이다. 월가가 없으면 누구와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것인가.”
기자가 묵은 호텔의 카운터 직원 마리아는 “직장을 잃지 않은 게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호텔에서 만난 이탈리아 출신 대학생 우고 사마타노(22)는 “파트타임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 식당을 뒤지고 있지만 사흘째 허탕을 쳤다”며 “공부를 계속하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웅크린 채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걸어가는 뉴요커의 얼굴은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뉴욕=황유석 특파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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