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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업계 '전봇대'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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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업계 '전봇대' 싸움

입력
2009.03.1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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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곡동 우성아파트에 사는 주부 이모(62)씨는 최근 초고속인터넷과 집전화, 인터넷TV(IPTV)를 한꺼번에 묶은 A사의 통신 결합상품을 신청했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서비스 설치를 위해 방문한 기사들이 아파트 벽을 뚫겠다고 나선 것이다. 인터넷 선을 끌어올 전신주가 없어 우회해서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집 밖에 전신주가 잔뜩 서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전신주라고 다 같은 전신주가 아니다. 전신주에도 주인이 있다. 전신주의 대부분이 다른 업체 소유이다 보니, A사는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김씨는 "월 1, 2만원 아끼자고 벽을 뚫을 수 없어 서비스를 철회했다"고 말했다.

요즘 KT-KTF 합병 문제를 놓고 통신업계가 '필수 설비' 논란으로 뜨겁다. 필수 설비란 케이블 설치를 위한 전신주, 땅에 묻기 위한 관로 등을 말한다. SK와 LG 등 KT의 경쟁업체들은 KT-KTF가 합병하면 영향력이 커지니 필수 설비를 분리해 다른 업체들도 빌려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KT는 필수 설비가 기업의 사유 재산인 만큼, 함부로 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왜 필수 설비가 중요한가

필수 설비가 중요한 이유는 전화, 초고속인터넷, IPTV 등 통신 서비스를 위한 기본 뼈대이기 때문이다. 망, 즉 네트워크만 있다고 서비스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 망을 연결하려면 우선 이를 지탱할 전신주나 수도관처럼 땅에 파묻을 관로가 필요하다. 길거리에 묻혀있는 맨홀 뚜껑 위에 통신업체 이름이 적혀있는 곳이 바로 관로 진입구다. 필수 설비가 없다면 망 연결이 불가능해 유선으로 이뤄지는 통신 서비스를 할 수 없다.

따라서 필수 설비가 없는 통신사업자는 이를 빌리거나 새로 마련해야 한다. 문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 전국에 전신주를 세우고 땅을 파서 관로를 만들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든다. SK브로드밴드의 경우 11년 동안 5조7,000억원을 투자했으나, 필수 설비 보유 수준은 KT의 10% 미만이다. KT가 민영화 되기 전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마련한 필수 설비와 같은 수준을 갖추려면 SK브로드밴드는 60조원 이상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 KT와 경쟁사들의 필수 설비 보유량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2007년 6월 기준 KT는 380만개의 전신주를 갖고 있는 반면, SK브로드밴드와 LG파워콤은 전혀 없다. 통신관로는 KT가 10만8,509㎞를 보유하고 있으나, SK브로드밴드는 3,319㎞, LG파워콤은 1,564㎞에 불과하다.

필수 설비 같이 쓰자

상황이 이렇다 보니 KT의 경쟁업체들은 필수 설비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통신업계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굳이 중복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SK텔레콤 관계자는 "도로가 뚫려 있다면 같이 쓰면 되지, 그 옆에 굳이 또 도로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느냐"며 "중복 투자 대신 망과 서비스 경쟁을 벌여야 통신업계가 발전하고 이용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간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필수 설비의 임대 제도다.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에도 필수 설비 보유업자가 이를 빌려주도록 의무화한 조항(34조)이 들어있지만, 예외가 많고 실제 이행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즉, 설치 3년 미만 관로는 예외 조항에 따라 빌려주지 않아도 된다. 또 전신주와 관로 위치 등 임대를 위한 기본적인 정보 제공도 안돼 쉽게 빌리기도 힘들다.

그렇다 보니 경쟁업체들은 KT가 여러 이유를 들어 필수 설비를 빌려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일부 업체들은 KT 관로에 몰래 케이블을 집어 넣었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웃지 못할 숨바꼭질도 벌이고 있다. 또 임대가 쉬운 한국전력 전신주에만 잔뜩 몰리다 보니 케이블 무게를 못이긴 전신주가 부러지는 사태도 일어났다. 그간 이용자들은 인터넷 접속이 안돼 불편을 겪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경쟁업체들은 장기적으로 필수 설비 분리가 필요하지만, 우선 KT의 필수 설비를 자유롭게 빌려 쓸 수 있도록 방송통신위원회가 제도적 절차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기서 '현실화'란 중립적인 감독기관을 만들어 KT의 필수 설비 임대를 관리 감독하자는 것이다.

심지어 SK브로드밴드는 영국 오픈리치 방식을 감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오픈리치란 영국 BT사에서 필수 설비만 떼어내 만든 독립회사다. 대신 오픈리치는 필수 설비를 독점하면서 모든 통신업체들에게 이를 빌려주고 있다. 따라서 SK브로드밴드는 KT가 필수 설비를 분리한다면 SK브로드밴드의 필수 설비도 내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통신업계 입장은 절박하다. B사 관계자는 "유ㆍ무선 통신상품이 하나로 결합되는 추세여서 유선통신의 경쟁력이 이동통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며 "필수 설비에 따라 향후 업체의 사활은 물론이고 통신산업이 발전하느냐, 퇴보하느냐 기로에 서 있는 만큼 목소리를 높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KT는 그간 필수 설비를 충분히 빌려준 만큼 경쟁업체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KT 관계자는 "경쟁업체들로부터 필수 설비 임대 요청이 별로 없었다"며 "충분히 빌려준 만큼 현행 제도를 수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최연진 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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