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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버지의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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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버지의 자전거

입력
2009.03.11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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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이였던 나를 뒷자리에 태우고 동네를 달렸던 아버지의 자전거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검은 비닐 가죽을 씌운 삼각형 안장, 발이 닿지 않아 돌릴 수 없었던 네모난 페달, 페달을 사이에 두고 규칙적인 경로에 따라 묶인 체인, 체인을 지탱하던 은색 몸체, 몸체를 받쳐주던 부지깽이처럼 크고 단단한 브레이크까지.

뒷자리에 앉아 아버지 등에 매달려 자전거를 탈 때면 걸을 때와는 다른 바람과 햇살과 속도와 높이로 만나는 세상이 경이로웠다. 늘 똑같아만 보이던 골목길의 벽돌담이, 구멍가게 이름이 쓰인 입간판이, 낡은 갓을 쓰고 있던 가로등이, 대문가에 내놓은 쓰레기통들이 새삼스럽고도 정겨웠다.

평소 버스로 출퇴근을 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는 것은 휴일뿐이었다. 볕이 좋은 날이면 자매들과 나란히 대문가에 앉아 자전거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골목 어귀에 자전거보다 먼저 나타나는 것은 딸랑 거리는 경적 소리였다. 그 소리에 이어 자전거를 탄 아버지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등장했다. 지금도 나는 청년 시절의 아버지를 상상할 때면 경적소리와 함께 푸른 바람을 몰고 나타난 그 무렵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자식들은 차례로 아버지의 자전거로 타는 법을 배웠다. 제일 먼저 두 언니들이, 그리고 오빠가 자전거에 올라탔다. 아버지는 뒤에서 자전거 몸체를 붙들고 자식들이 천천히 페달을 굴리고 몇 번 비틀거리다가 균형을 잡고 안정적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기를 기다렸다. 적절할 때 자전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자식들이 홀로 달려 나갈 수 있게 하셨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안장에 앉을 수 없는 꼬마였다. 간신히 발이 닿아도 페달을 돌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나는 아버지가 늘 자전거를 붙들고 있는 게 아니어서 안전하다고 생각한 순간 쿵 하고 넘어질 수도 있다는 걸 여러 차례 목격해 왔다. 그 때문에 겁을 먹고 자주 뒤를 돌아보며 아버지를 감시했고 그러다가 언덕에서 굴러 꼼짝 못하고 누워 있곤 했다. 전적으로 겁쟁이였던 탓에 자매들이 아버지에게 배워 자기 자전거를 갖게 된 후에도 나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 자전거는 어떻게 되었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자전거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을 즈음에, 그래서 자전거에 더 이상 마음 쓰지 않게 되었을 때에 완전히 망가져 쓸 수 없게 된 것을 고물상에 팔았거나 버렸거나 했을 것이다. 그 자전거 이후로 아버지는 차를 타셨다. 신호와 차선에 주의하여 운전을 하는 아버지 모습은 매사 조심하는 중년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얼마 전 들른 친정에서 초등학교 이학년이 된 조카가 자기보다 큰 자전거를 타겠다며 나섰다. 아버지는 이제 당신이 잡아주지 않아도 능숙하게 자전거를 잘 타는 어린 손자에게 차를 조심해야 한다거나 위험하니까 너무 빨리 달리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 할아버지가 되셨다. 아버지의 청춘과 중년을 먹고 성장한 자식들도 어느 틈에 더는 청춘이라 부르기 민망한 나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손자를 내보내는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잡고, 아버지가 자전거 잡은 손을 일찍 놔 버려서 아직까지 자전거를 못 탄다고 괜한 투정을 부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잡아줄 테니 배워볼 테냐고 물으실 때는 고개를 저었다. 자전거를 잡아 줄 아버지 손에 힘이 부쩍 없어진 걸 알게 될까 봐서였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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